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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와 함께한 “고바우” 김성환 화백

에디터 이재민

현대사와 함께한 “고바우” 김성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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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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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 OPINION

평소처럼 원고를 마감하던 9월 추석 연휴의 어느날 저녁, 고바우 김성환 화백이 영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 날 쓰고 있던 원고는, 김성환 화백이 젊은 시절 펴낸 단행본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막 마친 글을 다시 열어 수정했다. 김성환(1932-)에서, 김성환(1932-2019)로. 한 세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시사만화의 거장이 펜을 내려놓는 순간에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는 감각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들게 했다. 

 

 

 

* 출생부터 한국전쟁까지

 

김성환 화백은 1932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이후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까지 졸업한다. 광복 이후 다시 서울로 와 경복중학교(현재의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술반장을 도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 원고를 보냈다. 당시 만 17세였던 김 화백은 외국 신문에 있던 만화란이 우리 신문에는 없는 것을 보고 “아무리 보아도 창문이 없는 집 같아 보였다(한영주, [한국만화사구술채록연구-김성환]).”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일보”에 공교롭게도 같은 제목의 만화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해방 이후 만화가 신문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학비를 대주겠다며 만화를 그려 주기를 바랐다. 그 만큼 빠르게 두각을 나타낸 작가였던 김 화백은 잡지 “화랑”, “만화뉴스”에서 연재했다. “만화뉴스”는 선배 만화가인 김용환 화백이 편집을 맡기도 했다. 만 17세의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김성환 화백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바로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공산군을 피해 숨어 지냈던 선생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만화신보”, “신태양”, “희망”, “학원”등 당시 인기를 얻던 잡지들에 작품을 싣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서양화가 김병기 화백(1916-)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 계몽포스터, 선전용 전단지(삐라) 제작과 주간 만화잡지였던 “만화승리”, “육군화보”등에 참여했다. 여기서 다양한 중진 화가들로 구성되어 있던 종군화가단과 함께 활동하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시기 김 화백은 전쟁의 참상을 그림으로 담는 한편, 만화를 통해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 만화 예술가 김성환

 

김성환 선생은 ‘고바우’뿐 아니라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 독자를 위한 만화 단행본 <세태만상>과 화집 <카리카추아>를 펴낸다. <세태만상>은 “주간 만화뉴스”, “만화신보”등 만화잡지, “신태양”, “희망”등 월간지에 실었던 작품을 모은 작품집이다. 만평, 일러스트, 네컷만화, 시리즈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1950년대 중반 당시에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는 세계와 당대의 시사 이슈를 정리했다. 

 

 

김성환 화백의 <세태만상>(1954)

 

 

2004년 발견된 <세태만상>의 추천사에는 서양화가 김환기 화백이 “어느 나라 민족이거나 그 민족의 문화가 높으면 높을수록 풍부한 유머를 가졌고 또한 그 경지가 높음을 볼 수 있다.”라는 말을 전했다. <카리카추아>는 '캐리커처'의 일본식 발음으로, 당시 유명인의 얼굴을 그린 화집으로, ‘TV쇼 진품명품’의 2019년 11월 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김성환 화백은 시사만화가 이전에 한사람의 예술가로서 만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홀로 새로운 가능성을 점치고 실험했던 김성환 화백은, 이후 ‘고바우 영감’을 연재한다.

 

* 고바우 영감, 14,139회의 역사

 

‘김성환’ 하면 떠오르는 캐릭터인 “고바우”는 1950년 피난 중에 탄생해 그해 12월 30일 발행된 “사병만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다락방에서 숨어 살던 김 화백은 200명이 넘는 만화 주인공을 습작노트에 기록했다고 전한다. 그 중 하나인 고바우는 ‘높을 고(高)에 이름은 바우로 붙여 친근하지만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을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만화적 과장이 들어간 캐릭터와 달리, 표정을 없애고 한가닥 머리털로 심리를 표현했던 것 역시 이런 고민의 결과다. 고바우가 국민적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은 1955년 당시 전국에 9만부를 발행하던 신문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부터다. 

 

 

1960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 4면​. <고바우 영감>이 지워진 채 인쇄됐다.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와 함께 한국 현대사와 함께했다. 1960년대 4.19혁명, 5.16 쿠데타는 물론 유신정권, 79년 박정희 사망, 80년대 전두환의 군부정권을 지나며 시대를 증언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대중은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하기도, 그의 목소리에 위안을 얻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김 화백은 적지 않은 필화 사건을 겪었다. 검열에 의한 삭제, 정정, 수정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즉결재판을 통한 벌금형, 괴한들의 미행, 안기부 등 정보요원들의 취조, “한국을 떠나라”는 협박까지 긴 시간을 시달려야 했다.

 

특히 1963년 AP통신이 ‘말을 할 수 없는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의 군사정부 언론탄압을 소개하면서 고바우를 소개한 이후 심해진 탄압은 1973년 산케이신문이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픽으로 전했으며, 이후 “고바우 영감은 살아있다”라는 기사로 김성환 화백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김성환 화백이 불려가자 세계의 외신기자들이 ‘김성환 화백이 어디에 있느냐’며 찾아나설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하야 후 동아일보에 실린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이 쌓아올린 14,139회의 “고바우 영감”은 한국의 역사 그 자체였던 셈이다. 서슬 퍼렇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쉬지 않고 한국의 역사를 그려낸 증인이다. 뿐만 아니라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의 연재를 마치고도 펜을 놓지 않았던 예술가였다. 근현대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록해온 페이지를 덮는다. 만화계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김성환 화백은 만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고인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글을 썼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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