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를 기르는 법> 리뷰

원문: https://ungzx.blog.me/221746127378


 1. 본 리뷰는 다음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을 필두에 두고 이야기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2015년 12월에 연재를 시작하여 2018년 3월에 완결되었고, 2016년에는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하면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작품이 완결된 것은 2018년이지만 상을 받은 것을 포함하여 대대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2016년 경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2019년에 이 작품을 다시본다는(review) 것 또는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늦어진 바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본 리뷰에서는 왜 그러한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2. 한국사회에서 2019년과 2016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시간대가 촛불혁명 이후와 이전─특히 직전─이라는 데에 있다. 촛불혁명이 과연 '혁명'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촛불혁명과 여기에 얽힌 여러 사건들은 전통적인 혁명의 의미처럼 국가의 수반을 결정하는 시스템 자체를 바꿔놓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시스템들을 인지하는 심리적인 환경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촛불혁명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촛불혁명을 통과함으로 그 이전부터 변화 및 형성되어 있던 인식이 끓는점을 넘어 폭발하여 공공의 장에서 확인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우리가 촛불혁명 이후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심리적인 환경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촛불혁명의 장에서 어떻게 공공적 담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나 하는 의문에 대하여, 우리 자신들이 어느정도 납득할만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고서는 이 동시대를 제대로 응시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따라서 촛불혁명 이후에 그 이전의 현상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를 지향하는 것이 적절한지까지도 알아보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2.1. 그러면 그 심리적인 환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2016년에 발매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두고 일어난 작용들은 그에 대한 분명한 예시이다. 소설은 1982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김지영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어디까지나 김지영이라는 개인의 경험을 서술하는 데에 집중하지만, 이따금 당시의 시대상에 관한 기사나 통계를 인용하면서 김지영이라는 개인의 삶이 '개인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환기한다. 이윽고 책을 읽은 독자들도─여성을 중심으로─'이것이 바로 내 이야기'라며 가공의 인물이 겪은 가공의 삶에 무척이나 강렬한 공감과 동질감을 표현했고, 이 표현들이 일종의 '선언'과 같이 받아들여지면서, 작품을 두고 '나=김지영'을 발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연대의 작용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은 소설뿐만이 아니라 만화매체를 통해서도 일어났는데, 그 작용이 가장 뚜렷하게 일어났던 작품이 <혼자를 기르는 법>이었다. 하여 지금에 이르러 이 작품을 다시 본다는 것은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사회 즉 동시대를 이해한다는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하지만 이는 곧 작품 자체를 관찰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으로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검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떠한 작품을 둘러싸고 일어난 주변 현상까지도 포함하는, 그 작용권에 있기 때문이다.


 3. <혼자를 기르는 법>의 경우 그 독자반응을 일차적으로는 웹툰 연재페이지의 댓글란을 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댓글들은 그 수가 굉장히 많으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인상서술에서부터 진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까지 제각각이기 때문에 따로 키워드 분석을 통한 통계를 내지 않는 이상은 댓글의 대략적인 성향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몇몇 베스트댓글을 끌어와 논거로 삼기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천수가 쌓여 지금의 베스트댓글이 된 댓글들이 한창 작품이 연재될 당시의 베스트댓글들과 같다고 여기기에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혼자를 기르는 법>이 연재되는 기간에 만화전문 웹진에 게재되었던 몇몇 리뷰들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들은 작품이 한창 연재되었던 기간에 투고된 글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반응이 기록된 것이라 볼 수 있고, 또한 만화전문 웹진에 투고되었다는 점에서 저자의 식견과 전문성을 신뢰할 수 있다.


 <혼자를 기르는 법>에 대한 리뷰는 본작이 가진 명성만큼이나 다양하게 있으나, 대부분의 리뷰들은 청년세대의 외로움이나 포기의 감정, 두려움, 불안 등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이것들 이외의 것을 추가로 언급하는 리뷰가 두 가지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디지털만화규장각의 만화 리뷰란에 게재된 <비록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존재일지라도...>(서은영 저)라는 리뷰이고, 다른 하나는 유어마나에 게재된 <혼자를 기르는 법=공간을 거주하는 법>(오혁진 저)이다. 전자는 "거대한 지구라는 공간 안에 마치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하찮은 존재마냥 던져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라고 쓰며, 작품이 다소 절망적인 운명에 내던져진 이시다를 주인공으로 그 운명 속의 존재자가 자기나름의 살아감을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을 담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후자는 "<혼자를 기르는 법>은 청년세대의 거주 공간 기록"이라며 작품이 공간이라는 테마에 집중하고 있음을 정리하고, 그 이유가 "인간은 공간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고, 공간 행위를 통해 현실의 삶을 펼쳐내기 때문" 그리고 "공간은 계속해 그들의 삶을 운명 짓는다."라며 인간의 존재방식이 거주 공간과 밀접성을 가진다는 것을 역설한다.


 여기서 짚고자 하는 점은, 이 두 리뷰에서 각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간'에 대해 논하는 바에서는 연결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전자의 리뷰에서 언급된 '존재의 이유'가 후자의 리뷰에서 '거주 공간'과 이를 확보하려는 발버둥이라고 표현되는 셈이다. 우리는 우주-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단순히 살아가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살아있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서는 나름의 거주 공간이 필요하다. 한데 고시원과 같이 사육장으로 비유되는 곳에서 생존은 가능할지언정 (존재론적)실존은 불가하다.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거주 공간을 확보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삶과 공간의 관계는 '살아감을 위한 공간'에서 '공간을 위한 살아감'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상기한 인용문을 통해 이를 정리하자면 <혼자를 기르는 법>은 '더 나은 거주 공간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일상'을 그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4. 하지만 그것이 <혼자를 기르는 법>의 다인 것일까. 거기서 끝났다면 <혼자를 기르는 법>이 그만한 화제성을 가진 작품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자를 기르는 법>은 철저히 개인의 일상을 묘사하는 작품이며 그 안의 이시다는 혁명을 향한 욕망은 고사하고 당장 살아가는 데에 집중하는 인물인데, 이 작품이 혁명과 어떤 관계라는 것인가.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앞선 이해의 핵심 어휘인 '거주 공간'에 대해 보다 상세히 관찰할 여지가 있다고 여긴다. 이는 '거주'와 '공간' 그리고 '거주-공간'을 구분하는데서 시작한다. 공간과 거주-공간이 어떻게 다른 지는 그 공간이 주거만이 가능한 곳인가 아니면 거주까지 가능한 곳인가에 따른 격차에 의한다. 주거 그리고 주거-공간은 단지 우리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볼일을 해결하는 기본적인 생활과 이것이 가능한 공간을 의미한다. 반면에 거주는 그 공간을 나의 토양삼아 나의 자아를 뿌리내릴 수 있는 정도의 충분함이 충족되는 정도의 생활을 뜻한다. 즉 우리가 '거주계약'이 아니라 '주거계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주거가 가능한 공간이 있다고 하여 거기서 거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충분함이 온전히 충족되지 않더라도 일단 사람은 자신이 확보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거-공간도 어느정도 거주의 성질은 지니게 된다. 단지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더 나은 거주-공간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외부로 의식을 띄워보낸다.


 <혼자를 기르는 법> 역시 작품이 진행되는 온종일 이 의식으로 일상의 공간과 공간에서의 일상을 관찰한다. 작중에서 이 관찰은 일상과 공간의 성질에 관한 부조리를 인식하게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은 "일상성의 부조리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언제 인간이 일상성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가라는 문제다."(카렐 코지크, <구체성의 변증법>)1 우리의 일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부조리에 놓여있다는 사르트르나 카뮈가 할법한 발언이 아니다. 우리가 왜 일상이 가진 공간성, 그 일상성에 대해 부조리를 '일상적으로' 느끼게 되는 지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 그 공간을 구성하는 현실, 그 현실을 구성해 온 역사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현실이 개인에게 강요한 부조리에서 일상성에 대한 반성이 결과한 것이다."2 이러한 발상에 이르게되면 이제 '외부'로 의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곳은 일상에 연결되어 '내부'의 연장선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기했듯이 우리가 일단 우리에게 확보되어 있는 공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더 나은 거주-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살아가기 위한 환경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5. 이것이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는 이시다의 내부지향적 의식으로 마련된다. 이시다는 자신이 칩거하는 공간의 내부를 아주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대해 탐구하면 할수록, 이 공간에 대한 이시다 나름의 장소감이 형성된다. 공간space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이입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누적됨으로써 장소place의 지위를 획득한다. "마페졸리는 근대의 '자아 중심' 세계관과 탈근대의 '장소 중심' 세계관을 대비시키면서 현대의 사회성이 장소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3 전자에서는 권위를 가진 개인의 특정한 관점을 어떻게 투영하느냐에 따라 사회가 구성된다. 반면 후자에서 사회는 일반 사람들이 저마다의 주관에 따라 지니고 있는 바의 종합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마페졸리는 우리의 일상성과 그 기반이 되는 생활세계에 대한 탐구가 그 어떤 이론적 표상 보다도 이전에 주목되는 것이며 "그 생활세계는 상식, 현재, 그리고 감정이입이라는 세 가지 표제로 요약할 수 있다."4고 말한다. 이시다가 행하는 일상성에 대한 탐구 역시도 동시대의 삶을 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현재성을, 그 탐구가 어떤 이념이 아니라 실제 사회에 밀접한 거주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상식성을, 그리고 일상의 부조리를 내부지향적으로 번역해낸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의 성질을 가진다. 하여 이시다 자신으로부터 이 탐구가 지향하는 곳이 어디든,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는 그 경험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된다. 체험이 된다는 것은 '나'의 심리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독자는 역으로 이시다라는 가공의 인물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이시다라는 그리고 자기자신이라는 '혼자'를 발견한다.


 왜 거기서 발견하는 것이 '혼자'인가. 이시다는 실존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삶 역시도 가공의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일상툰이라는 형식에 따라 거기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되어 있겠지만, 작가가 이시다에 자신을 투영하면서도 둘은 별개의 인간이라는 구분을 확실히 하듯이 독자도 그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하여 이시다와 '나'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아니, 만날 수 있다고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이 자신이 가진 장소성을 상대에게 들이밀지 않음으로서 각자의 거주방식을 있는 그대로 놓아둘 수 있고 또한 우리가 타자로서 각자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은 혼자여야만 한다. 하여 '나'는 혼자이고 '너'도 혼자이고 '우리'도 혼자이다. 이 발견이 뜻하는 바는 '혼자'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코 자신들을 특정한 동일성으로 묶지 않는다는 것이며 동시에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서 <혼자를 기르는 법>과 그 독자들이 형성한 작용권은 공공권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공공권은 우리 혼자들을 공동으로 묶지 않는다. 공공장소라는 어휘가 함의하는 것에서 보이듯이 그곳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며 어떤 균질적인 가치나 이념을 내세우는 공간도 아니고 하여 공동체와 같이 어떤 일원적인 귀속을 요구하지도 않는다.5 공공-장소란 어떤 상위의 기관으로부터 정해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의식과 지향이 교차하는 시민들 개개인이 만들어가는 하나의 방명록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만일 같은 공간에 있었더라도 우리는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험을 출입구로 하여금 체험으로서 서로에게 와닿을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일상의 경험과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타자는 '익숙한' 타자6789인 것이다. 우리들 개인이 자신의 일상에서 사적인 층을 쌓아올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 기반은 공공의 것에 기반한다는 점, 모든 사람은 혼자이지만 동시에 혼자만은 아니라는 점은 '나'가 혼자임과 동시에 나의 거주 문제가 타자의 거주 문제와 맞은편에 있다는 사실로서 확실시 된다. 일단 그것을 체화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타자와 함께 나의 거주 문제까지도 애써 모른척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석되는 사회안의 사람들이 더이상 자신의 일상성을 지속시키지 못할 때 그 때 혁명이 시작된다."(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10 각자가 살아온 삶은 모두 다르지만 그동안 우리의 일상이 그와 같은 부조리 속에 놓여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부조리한 일상을 이제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이 불특정다수의 개인들을 <혼자를 기르는 법>이라는 광장으로 모이게 만든 이유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상성의 붕괴에 대한 저항이다. 이것이 혁명이 가지는 가장 분명한 성질인 것이다.


 6. 이와 같은 관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일상과 혁명이라는 마치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팽창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간의 연결점이 공공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에 있다. 개인이 일상의 공간에 투사하는 장소성으로부터 그 공간이 가진 공공성이 드러난다는 이해는 이 문제가 공공의 장에 걸릴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소를 애초에 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의 의식을 자연스레 끌어당긴다. 뿐만 아니라 이는 '광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에 대한 동시대적인 응답이기도 하다. 공공장소가 곧 광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광장이 되려면 적어도 그곳은 공공장소여야한다. 다시말해 <혼자를 기르는 법>은 공공장소를 '일으키는' 작품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촛불혁명 이후를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일상을 어떻게 공공장소와 연결지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지점부터, 그 이후의 삶이 어디로 향해야 할 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11


  1. <일상생활의 사회학>(1994), 133p 수록
  2. Ibid, 133p
  3. 신지은, 「일상의 탈중심적 시공간 구조에 대하여」(2010), 17p
  4. 미셸 마페졸리, <일상생활의 사회학>, 59p
  5.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2009), 27-30p 참고. (1)공동체가 닫힌 영역을 형성하는 데 반해서, 공공성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2)공공성은 공동체처럼 균질-동일한 가치로 채워지는 공간이 아니다. (3)공동체는 그 구성원이 가진 내면의 정념이 통합의 기반이 된다면, 공공성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기(≒지향)에의 관심이 만남의 기반이 된다. (4)공공성은 정체성의 공간이 아니므로 공동체와 같이 일원적이고 배타적인 귀속을 요구하지 않는다.
  6. 이 표현은 우르술라 티드의 <시몬 드 보부아르, 익숙한 타자>(2007)에서 가져왔으며, 여기서는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사용했다. 이 개념은 보부아르의 <애매성의 윤리학;국내명: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1947;2016)에서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인간의 타자성을 지칭하는 우르술라의 표현이다.
  7.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2016),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2016) 참고
  8. 문성훈, 「다시 보부아르로! 실존주의적 페미니즘의 논쟁적 재평가」(2015) 참고. 여기서는 논의의 실존주의적 측면을 강조하여 사용했다. 허나 <혼자를 기르는 법>이 여성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이는 페미니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9. 공동체는 공동同이라는 점에서 '같은 것-우리'라는 모종의 동일성을 필두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공공체는 그렇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차이'를 가진 것들의 모임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차이를 가질 뿐인 원자화된 개인이 아니라, 각자의 의식과 지향을 가지고 그 지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종의 ‘장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공공장소’이다.
  10. <일상생활의 사회학>(1994), 73p 수록
  11. 이러한 움직임은 '메타모더니즘'과도 관계가 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이루어지지 못한 이상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절망적인 회의론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문화운동의 한 형태"이다. ; 최은녕, 「21세기 새로운 예술미학으로서의 메타모더니즘」(2017), 2p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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