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세이) 앨런 무어​(Allen Moore)와 에디 캠벨(Eddie Campbell)의 [프롬 헬(Fron Hell) / 1989]

“이 책을 폴리 니콜스, 애니 채프먼, 리즈 스트라이드, 

케이트 에도우즈 그리고 마리 자네뜨 켈리에게 바칩니다. 

여러분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어려분의 죽음,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편히 쉬세요. 숙녀 여러분.”


이 작품의 묘미는 “인내심"이다. 특히 너무나도 낯선 연출과 배려심이란 찾아보기 힘든 그림체가 주는 불친절함은 한국 독자들이 기준으로 잡고있는 일본식 연출과 비주얼을 생각해 볼 때 굉장히 불쾌할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만화를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큰 도전이라는 것. 늘 주장하는 바이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처럼 우리도 좋은 독자가 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며 앨런 무어(Allen Moore)와 에디 캠벨(Eddie Campbell)의 [프롬 헬(Fron Hell) / 1989]을 얘기해보려 한다.



[프롬 헬]은 영국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유명한 화이트채플 연쇄살인 사건(Whitechapel murders)에 대한 앨런 무어의 집요한 정보수집과 상상력이 만들어 낸 수작으로 [왓치맨(WATCHMEN) / 1986-1987],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 1982-1985, 1988-1989] 만큼의 흥행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작가를 얘기 할 때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다. 영미권 최고의 스토리작가로 평가받았던 그는 앞서 말한 작품들과 함께 [헬블레이저(HellBlazer)]의 원작자이기도 하고 표지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배트맨: 킬링 조크(Batman: Killing Joke) / 1988]의 스토리 작가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라클맨(Miracleman/Marvelman) / 1982-1984], [스워프 씽(Swarp Thing) / 1984- 1987], [젠틀맨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 / 1999 - 휴재 ]등 여러 작품의 스토리를 담당하며 시대정신을 담아 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작화를 담당한 에디 캠벨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소재로 한 그래픽노블 [바커스(Bacchus) / 1987]와 자전적이야기 [알렉(Alec) / 1984]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화이트채플 살인사건이 일어난 1888년 당시 신문에 실린 존 테니얼의 만평 [화이트채플을 배회하는 잭 더 리퍼]와 아주 흡사한 애칭판화 느낌을 잘 살린 이 [프롬 헬]이야 말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첫 페이지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이 책을 폴리 니콜스, 애니 채프먼, 리즈 스트라이드, 케이트 에도우즈 그리고 마리 자네뜨 켈리에게 바칩니다. 여러분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어려분의 죽음,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편히 쉬세요. 숙녀 여러분.”


이들은 모두 화이트채플 사건 속에 살해 당한 여성들로 이 문구만 봐도 이 작품의 구성에 있어 앨런 무어가 어떤 기조를 가지고 임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여러분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여러분의 죽음, 그것만은 확실합니다.”라는 부분은 이 작품은 여러분의 존재와 죽음 위에 쓰여진 픽션임을 더더욱 인정하고 있고 작가도 그 이상의 확신을 가지고 써내려가진 못했다는 명확한 태도를 못 박아두었다. 그 말인 즉, 스토리의 진행은 픽션일지 모르겠으나 그 안에 숨어있는 다른 메세지를 발견해보라는 뜻이기도 한데 그 메세지는 독자의 경험과 성향, 정보의 양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작품이 바로 [프롬 헬]이다. 한 두가지의 생각만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는 그런 깊은 맛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권"기준으로 볼 때,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가 있었다. 계급이 존재하던 시대에 도덕과 양심, 기품과 교양, 권리와 존중은 일부 특권층만 누리는 호사였고, 그들은 의학과 과학, 무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몇 백년을 지내왔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가 온다. 멀게는 1215년 마그나카르타에서 가까이는 명예혁명과 산업혁명까지.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아래계층에게도 도달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엔 "계급"이 아닌 "돈"이라는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이 대다수의 도덕과 존중의 머리채를 잡아 시궁창으로 돌진했던 1888년 영국에서 이 연쇄살인사건은 시작된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 바로보기 -> https://en.wikipedia.org/wiki/Whitechapel_murders

2,3명의 남성에게 몸을 팔아야 여관에서 하룻밤을 쉴 돈이 마련돼던 빈민가의 여성들이 살해의 주대상이었는데 작품은 그 살인에 대한 "이유"를 사탕가게 여점원과 앨버트 왕자가 사생아를 낳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매춘부 4명이 왕실을 상대로 협박편지를 써 돈을 얻으려 했고 이걸 본 빅토리아 여왕은 왕실 주치의 '윌리엄 위시 걸'경을 불러 이 4명의 여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으로 그 설정을 잡았다. 주인공 윌리엄의 사적인 설정은 정신착란과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성장과정을 작품 초반에 연출하여 그 기대에 부흥하는 살인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영화 [비우티풀]을 볼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작화와 연출, 시나리오 모두가 뛰어나지만 영국인이 아니기에 이해 할 수 없는 느낌, 번역되었기에 와닿기 힘든 대사, 그 문화권에서 살지 않기에 곧 바로 눈치 챌 수 없는 행동들, 또 그 시대에 살지 않기에 넘겨 짚을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도무지 한두번을 읽어선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작품의 끝에 작가가 모든 페이지의 연출의도를 써둔 작품해설서가 함께하기에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아도 두번째부턴 그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을 해설서를 보며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구입해 두고 천천히 읽으며 그 깊이를 알아가기에 좋은 취미활동이 될 것이란 확신은 들었다. 한 마디로 구입해 소장 할 만 하다는 뜻이기도하다.


가장 돋보인 부분은 Chapter Two에서 윌리엄 위시 걸의 성장과정과 성향을 1인칭 시점으로 보여주는 연출이다. 주인공의 등장에 어울리는 연출로 독자에게 이 챕터가 끝나기 직전까지 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며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발상이 어울렸다. 솔직히 이 작품을 통틀어 왜 이렇게 연출했는지 가장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이 Chapter Two에서 캐릭터가 보여준 모습들이 향후 Epilogue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배하고 있고 이 부분이 이해가 되어야만 내용의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도 느꼈지만 스토리작가 앨런 무어는 이 작품의 모든 과정에서 인과관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역사적으로 너무 유명한 사건이고 또 미스테리한 사건이기에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이전부터 여러 의견과 가설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분명 작가는 이것들 중 많은 것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이 과정에선 반대 의견의 여러 비판이 따라올 것이기에 그것을 최소화 시키기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비판을 피하고자 하다보니 이 왕실 주치의가 원래부터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있었고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점에 무게추를 많이 올리게 된 것 같아 아쉬웠다. 모든 살인사건, 연쇄살인을 가장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범인이 사이코패스다."라는 컨셉인데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선 이것을 활용하는 방식과 디테일이 다른 컨셉의 디테일에 비해 덜 조각된 상태로 작품 위에 올려져있는 느낌을 받았다. 윌리엄의 성장과정을 하나가 아닌 두개의 챕터로 나누어 한 파트는 타고난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보여주고 다음 파트에서는 그 성장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심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설명이 뒷받침 되었다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가 지금보단 몇 배 더 상승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왜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난자했는지에 대한 민첩한 이해를 위해선 분명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확신한다. 이왕 작품을 길고 묵직하게 가져가는 김에 앞서 말한 부분도 함께 초반에 설명되었다면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윌리엄 경이 중얼거리는 내용들에 대한 당혹감이 덜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런 당혹감은 두번 읽으나 세번 읽으나 똑같이 발생하였고 보면 볼 수록 2개 정도의 챕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이 앞서 말한 "인내심"을 요하는 점이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참고로 나머지 1가지 아쉬운 챕터는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내면의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의 명대사 혹은 키포인트로 윌리엄이 네틀리에게 편지내용을 불러주며 "지옥으로부터. 네틀리, 그걸 적어. 지옥으로부터."라고 말하는 장면을 꼽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대사는 Chapter Ten에 등장했던 윌리엄 경의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네틀리. 이제 시작일 뿐이야. 좋든 싫든 난 20세기를 제공했다."라는 말이다. 그가 제공했다는 20세기는 무엇을 뜻할까. 우린 이 대목에서 모든 것이 "계급"으로 부터 나오는 시대에서 모든 것이 "돈"으로 나오는 시대로 변한 그 초기의 천박함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계급에 걸맞는 도덕과 양심, 기품과 교양, 권리와 존중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걸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상기해 볼때 "돈"이 도덕과 양심, 기품과 교양, 권위와 존중을 제대로 갖추기 위한 시간도 만만치 않게 오래 걸릴 것이고 그 페러다임시프트가 방금 막 이루어져 모든게 돈으로 통하는 가장 더럽고 천박하며 인간을 능멸하던 시대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19세기, 20세기였다. 지금도 우린 그 돈에 걸맞는 태도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과도기에 살고 있고 이것을 앞으로 우리 또한 지속적으로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앨런 무어는 이 사건을 빌려 외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래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악"이라는 것에 대해 나도 이 사건을 빌려 말해보자면 많은 사람들은 "악"을 뿌리뽑자고 주장하고 그래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지만 그것은 "악"이 자행되어 가져 온 무섭고 두려운 현실에 대한 당장의 회피를 위한 비겁한 변명이다. "악"은 어디까지나 관리의 대상으로 이성을 위시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제어되어야 하며 그 시대가 규정하는 타인의 삶을 침범해도 되는 범위 안에서 욕망과 욕구, 자아실현 등의 재료로 사용되어야 한다. [프롬 헬]에서 느낀 고민거리는 바로 이 "악"의 관리를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모두에게 교육을 권하는 이유는 그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성을 추구하며 성장해 이 사회의 공론과 토론을 이끌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그 관리의 기준을 어디로 놓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건 살인자도, 여왕도, 경찰에게도 모두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며 이 작품은 내게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남겼다.


이 작품은 시공사에서 출판되었고 정지욱 작가가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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