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서브컬처 리뷰대회 심사결과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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쉑터

 20세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식민지화에 대한 열광이 매우 치열해졌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에도, 그 이전의 시대에도 식민지에 대한 열광은 물론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대륙을 잠식하고, 영국은 인도를 잠식했습니다. 주로 제3의 국가 또는 자원이 풍부한 나라와 민족들은 신식 무기에 의해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았으며, 때에 따라서는 그 나라가 붕괴하고, 민족이 말살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해서 20세기를 지나 21세기까지 이룩한 현대사회 문명은 과연 올바른 기술 진보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명이란 과연 어떻게 이룩한 것이고, 그 문명에 정착한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이번 리뷰의 대상인 <골든 카무이>에서 보여준 근본적 문제점들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인류의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시 전쟁이라고 봅니다. 전쟁에서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총검의 정교함이 필요했고, 거기에는 각종 물리학과 화학적 베이스가 필요했고, 금속탄광에 순수한 철을 얻어내기 위해 제련술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하기에 공장이 필요하고, 대규모 공업시설 유치에는 많은 자금과 인력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물론 농경중심사회에서 대규모 생산사회로 전도됨에 따라 발전하나, 거기에 작용하는 기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전쟁에서 정치적 영역의 비중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근대 이전의 전쟁은 칼과 활, 총이라고 해도 단발식 장전 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관총이 나오고, 탱크가 나오며, 전투기의 등장에서 인간의 살상은 매우 간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전쟁은 직접 적과 대결하여 죽였다면, 이제는 무기라는 도구의 성능에 따라 다르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장수와 지휘관은 과거에는 앞장을 선 반면, 후대로 갈수록 지휘관은 뒤로 물러나고 일반병사들만 총알받이가 됩니다. 개인의 전투적 기량이 전장을 좌우하던 시대에서 기술력과 물량의 조달이 결국 전투를 지배하던 세상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근대화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고, 근대화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가령 공군의 무기체계는 가장 신식입니다. 공군 전투기는 물론이오, 무장체계, 레이더, 각종 특수장비는 첨단기술의 정점입니다. 하지만 군대 내부는 가장 정체된 집단 중에 하나이고, 상당히 보수적인 조직입니다.


 그런 점에서 첨단화된 군은 미래지향적 기술력에 정신적으로 과거의 산물이 깃듭니다. <골든 카무이>란 작품은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중일전쟁을 거치고 러일전쟁 이후를 다룬 점에서 일본이란 국가가 근대화로 성공했지만, 근대화라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인 듯합니다. 카무이란 단어가 일본 고유언어가 아니라 아이누족이란 토속민족의 신이라고 한 점에서 근대화된 일본, 비근대화된 아이누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츠루미 중위라는 인물은 러일전쟁 이후 전쟁에 빠진 인물이고,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인물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병력이나, 그 병력이 입고 먹고 싸울 수 있게 하는 것은 군수물자입니다. 전쟁은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전쟁산업이란 말이 있듯이,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과잉생산입니다. 과잉생산으로 인해 물품이 재고가 되어 시장에 팔 수 없고, 그러면 자본가들은 도산하게 됩니다. 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국가적으로 재정에 큰 타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빠집니다. 자본주의의 도입은 자유국가나 제국주의나 모두 팽창을 해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이유에는 군국주의적 가치관도 있지만, 자본주의적 요소 또한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장 형성, 조선이란 길을 창출하여 중국과 러시아까지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상품을 만들어내어 이윤이 생기면, 다시 그 이윤을 통해 생산설비를 확장하여 재생산 이상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더 큰 이윤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시장을 필요로 합니다. 츠루미 중위는 그것을 압니다. 생산품의 소비는 경제 활력에 큰 도움이 되고, 결국 전쟁은 많은 물품을 파괴해야 하니 그 이상으로 경제적 이익을 줍니다. 단지 문제는 생산하는 물품에 대한 대금조건입니다. 국가가 계속 내어주면 국가부도가 나니, 새로운 식민지에서 재원을 약탈하거나 금은보화 등을 수탈합니다. 이런 반복적인 “생산-소비-수탈-이윤-생산”은 어느 순간 다른 국가와 마주치게 됩니다. 러일전쟁도 역시 그런 이유가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크게 이겼지만, 러일전쟁에서 리뷰 내용처럼 심한 타격을 받았다면,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전쟁에서 싸워 이겨 이익만 노리는 것은 생각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동원된 군인들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군인에게는 국가에 대한 절대적 복종, 또는 신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종교적 발언이 전부였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는 전범을 모시고 있고, 범죄자들은 신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개인이 사망해도 국가는 지속되니 그 희생자는 영원히 국가의 신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군국주의의 토대이고,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전사자 숭배는 군국주의 이념의 토대가 되고, 우익관련 인물에게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권력을 계속 잡을 수 있는 논리가 됩니다. 그런데 전쟁을 수행하면서 자연을 왜 등장시키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도심지에 살아가려고 하지, 외지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도 문명시설의 기반이 잘 갖추어진 도시에 살려고 하지, 도로조차 잘 닦이지 않은 산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행이나 드라이브 코스로는 자연에 맞닿은 곳에 가려고 합니다.


 재조산하(再造山河), 이 글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 적어준 글자입니다. 조선은 이미 폐허가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폐허가 된 곳은 도성을 비롯한 마을이지, 산과 강은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만들 곳이 국가(國家), 한양(漢陽), 조선(朝鮮)이면 몰라도 왜 산과 강일까요? 자연이란 공간이 과연 어떤 공간일까요? 필자분이 잘 보신대로 전쟁포스터에는 국가를 상징하는 곳은 도시나 기념시설물보단 들과 강 그리고 바다 같은 곳입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 자연이란 곳은 누구에게나 소유되지 않으나,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사유물을 넘어 집단이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도시의 빌딩, 공장, 도로는 건축주나 공장주, 자동차 소유주가 아니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공통된 마음으로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은 자연입니다. 산과 들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입니다. 그리고 산과 들은 모든 생명이 시작되지만, 다시 돌아가는 장소입니다. 한국의 전통장례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나 민족의 장례문화를 보면 매장, 화장 후 유골 흩날림, 사체를 훼손하여 야생생물에게 먹이는 모습도 있습니다. 장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르지만, 기본으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리뷰를 보면서 조금 보강해야 할 부분은, 생태계는 동식물의 먹이연쇄가 지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분해자, 생산자(식물), 1차 및 2차 소비자(동물)가 지속적으로 순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식물은 에너지를 공급받고, 그 에너지를 동물이 먹지만, 나중에 죽게 되면 분해자들이 최종 처리합니다. 물론 식물은 태양에너지 외에도 지구 내 각종 물질을 흡수합니다. 이때 분해자들이 만든 물질들을 식물이 흡수합니다. <골든 카무이>에서 아이누족은 바로 이런 생태계의 원리에 순응합니다. 전쟁을 일삼는 부류는 파괴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하게 소비합니다. 농촌이나 자연생태계는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맞춥니다. 아이누족은 자연에 순응하므로 일본근대의 군대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척박하나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 수 있고, 집단의 무리에서 개인성을 존중받습니다.


 반대로 츠루미 중위의 영역에서 인간은 도구 중에 하나이고, 인간 개인적 희생은 전체를 위해 필요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노와 적개심을 모아 하나의 큰 이념으로 승화시킵니다. 군인은 육체적으로 인간의 모습이나, 정신적으로는 인간이기보단 살인을 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분노와 적개심은 살상에 대한 욕구를 증폭하며,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보상받기 위한 보상심리로 타인에게 해를 가합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된 원인은 러일전쟁 이후 국가가 참전군인에게 적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고,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가치관을 변모시키므로 전쟁터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자신 안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자신 안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를 소모시키면 안 되나, 전쟁에서 느낀 공포와 적개심에 따른 다른 희생자를 찾고, 또 다시 자신의 인간성을 소모시킨 후 살육을 자행합니다.


 이것을 제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자연성, 즉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영역에 가는 것입니다. 리뷰에는 루소가 자연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에밀>에서 제시한 것처럼 인간은 곰과 같이 숲에서 살 수 없고, 단지 도시문명으로 인해 타인의 가치관에 의해 살아가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루소의 자연성은 환경생태학적인 자연이 아닌, 인간 본연의 자연입니다.


 단지 그 공간이 환경생태학적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 좋을 뿐입니다. 아이누족은 자연과 같이 살아가나, 곰과 같이 살지 않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인구가 증폭하면 많은 땅과 재원을 필요로 합니다. 문화인류학적 시선이나, 인구의 증폭에서 원래 자연의 공간이었던 곳은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문명화됩니다. 문명은 자연에 인간의 노동력이 투하된 곳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계속 착취하게 되면, 최종적으로는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게 되고, 인간이 인간을 정복하게 되면 인간성은 파괴됩니다. 자연은 인간의 숭배지여야 할 것인데 어느 순간 정복의 대상지가 됩니다. 저는 자연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두 가지 심리가 생각납니다. 한 가지는 영원히 보전해야 할 절대적 가치관, 다른 한 가지는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이죠.


 실제로 자연을 포스터 위에 그려 넣지만, 그런 자연들은 도시로 변하고, 각종 공장에서 폐수와 매연이 뿜어져 나옵니다. 사실과 다르게 기만적 정보를 통해 현실에 없는 가상적 영역을 군중의 가치관으로 대체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미국의 그랜드캐넌은 상당한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나, 한편으로 세계적인 관광지로서 인간의 문명에 정복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랜드캐넌은 자연환경으로서 지켜야할 공간은 맞지요. 그런 자연환경을 인간의 자의적으로 이용하는가 아니면 아이누족처럼 순응하는가는 그 나라와 민족, 집단들의 특성에서 기인할 겁니다. 아이누족과 생활하는 스기모토가 자연 속에서 치유되는 것은 문명과 단절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간극에서 만일 문명사회가 개입되지 않은 단절된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지만 문명은 계속 증폭하여 비문명권의 세계조차도 정복합니다. 설사 비문명권은 아니더라도 어느 국가에서 농촌 및 자연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적으로부터 그 공간을 강탈당할 수 있다면 어쩔 수없이 총을 들겠지요.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현대인들은 늘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지만 막상 높은 산에 올라가 대자연을 바라보거나 넓은 바다를 보면 그 스트레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도시에서는 하나의 부속품이나, 자연에서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나로 있기 위한 공간, 그것을 살면서 늘 느끼더라도, 죽음 이후에도 그 마음을 갖고 싶은 게 아닌가 합니다.



엘리프

 이 글을 읽고 나서, 최근에 읽었던 <신국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결전생활>을 떠올렸습니다. <골든 카무이>와 다른 시점이기도 하지만, 40년대 이후의 패망해 나가는, 그래서 결국 해방 이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던 일본의 잔혹한 모습이 사실은 러일전쟁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구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리뷰는 <골든 카무이>를 통해 20세기 초반 인간의 삶에서 계속되었던 광기의 모습을 되짚고자 하는 좋은 접근이 있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이뤄지고 있는 의미망의 반전(즉 인간 대 자연에서 자연에 가까운 아이누족들이 천대를 받았던 것에서,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아이누족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의미의 배치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다시 짚어주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작품들을 <골든 카무이>가 가지는 의미로 설명하기 위한 레퍼런스로 지속적으로 제시함으로서 이 작품이 해당 작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작품에서 국가권력이 어떠한 태도로 다뤄지는지 입체적으로 설명하여 작품에 대한 이해를 잘 도와주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리뷰가 작품을 통해 드러낸 자연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에 대한 지적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좀 더 다루어졌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리뷰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은하철도의 꿈>(2014)을 떠올렸습니다. <은하철도의 꿈>은 해방 이후 시보탄 섬에 러시아군이 진주하면서 일본인과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 생겼었지만 사라진 유대관계, 그리고 러시아라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북방영토의 꿈’을 다시 일으키는 권력적인 작품으로 작용했죠. 현재의 오키나와 판타지가 1944년 오키나와 전쟁으로 인한 오키나와인의 희생을 감싸주지 않듯이, 이 작품 또한 자연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일본국이 과거 일본제국으로서 저질렀던 셀 수 없는 폭력을 감추기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반추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푸른봄

 <골든 카무이>는 대중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아이누)에 장르적 상상력을 더해 작품을 그려냅니다. 하여 일본의 근대에 대한 시선을 조금 더 과감하게 담았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왜 하필 근대여야 했을까?’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풀어내는 지점들이 있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쉑터

 용수철님의 리뷰 대상이 된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을 보니 과거의 일본 애니메이션 <내 뇌 속의 선택지가 학원 러브 코미디를 전력으로 방해하고 있다>가 생각났습니다. 남자주인공은 인물도 좋고 성격이 나쁘지 않으나, 어느 날 자신의 뇌 속에 선택지가 나오고, 선택할 수 있는 범주는 매우 적고 게다가 그 선택지는 변태 짓이나 바보짓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원하지는 않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 사실 이런 빙의적 태도를 접하는 것은 매체적으로 애니메이션보다 게임에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이런 선택지가 다수 등장하고, 선택의 차이는 게임 완료 시 엔딩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같은 소설이나 게임의 선택지는 우리 인생과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사 대상이 되는 작품의 제목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처럼, 사실 악역을 맡은 자는 반드시 파멸의 길로 접어야 하는지, 혹은 악역을 맡아야 하는 자가 악인은 아니지만 악역이란 설정구조에 억지로 무리하게 배치된 존재인지는 다릅니다. 후자의 존재에게 선택지란 삶과 죽음의 상황을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삶과 죽음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결정되고, 본인에게 결정권은 없고, 단지 그 결정권에 자신을 변호하는 입장만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결정권에 대한 변호권마저 없다면, 세상은 흑백의 논리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되겠죠.


 저는 글을 읽으면서 문득 삼국지 게임이 생각났습니다. 중국 후한 말기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삼국지>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것이니 당연히 용수철님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게임이 롤플레잉으로 제작될 때 조조에 대한 모습은 폭군과 반역자 그리고 최악의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이후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이번에 유비 대신 제갈량을 중심으로 내세워 사마의를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사마의는 조조와 조비를 배신하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합니다. 제갈량의 목적은 사마의 타도였습니다. 그런 후 <삼국지 조조전>이 나옵니다. 조조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이어지고, 적의 총대장은 제갈량입니다. 그런데 제갈량이 촉한을 지키려는 자와 지키지 않은 자로 나누어집니다. 제갈량의 태도를 좌우하는 것은 제갈량이란 캐릭터의 설정이 아니라, 플레이어인 조조가 어떤 식으로 선택을 하느냐 입니다. 선택지에 따라 관우를 휘하 장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삼국지처럼 주동인물 “유비, 제갈량”, 반동인물 “조조, 사마의”에서 주동인물 “조조”, 반동인물 “제갈량”으로 전도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악역으로 묘사된 조조처럼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 페넬로페는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처지와 부조리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비틀어낸 것이라 봅니다. 용수철님이 잘 설명하듯이, 이분법적인 서사를 넘어서, 서사의 다양성과 서사라는 세계에서 캐릭터라는 존재가 그 세계관에서만 순응해야 하는 존재로 전략하기보다는 그 세계관에 맞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가 된 것이겠죠.


 리뷰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점은, 반동인물인 페넬로페는 악역을 맡아야 할 여성이나 그 여성 역시 하나의 피해자란 점입니다. 만일 이반 에카르트가 처음부터 실종되지 않았다면, 혹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페널로페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죽음의 게임에 던져지지 않았으니 말이죠. 리뷰를 읽다보면 스토리상 페널로페가 이반을 탑에서 밀어 살해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과연 그녀를 악역으로 만들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는 픽션이고, 그 안의 등장인물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관에서 움직이고, 그 세계관은 작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입니다. 드라마라는 비극은 결국 작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불쾌하기 짝이 없겠지요.


 저는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과 리뷰를 읽으면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전환도 좋지만, 그 전환이 되는 장면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 작품에 빙의하는 독자라면 누구에게 더 애정이 가겠는가? 현실 그 자체의 부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페널로페의 행동에 큰 공감이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란 개연성 또는 필연성에서, 단지 주동인물의 복귀로 인해 자신의 생살권을 박탈당하는 것 역시 부조리한 형태라 보입니다.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반을 살해하는 것도 부조리한 행태이기도 합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행동으로 작품을 이어가는 페널로페의 행위가 독자의 입장에서 공감 또는 빙의하는 이유는 “나라도 그럴 수 있을 거야.”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겠죠.


 한편,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태생의 이유만으로 공녀가 되는 이반 에카르트,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 현실 속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성취한 인간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목표를 달성한 인간이 더 좋다고 여깁니다. 단지 태생상의 이유로 이반 에카르트만 총애하는 세상이 된다면, 비록 가상의 이야기지만 현실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독자는 이반 에카르트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반 에카르트에 대한 거부감이 올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신화의 이야기에서는 분명 이반 에카르트적인 인간이 살아남겠죠. 하지만 신화적 요소를 해체하고, 현대적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페널로페의 입장에 공감하고 빙의하는 편이 오히려 거부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엘리프

 이 글은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이라는 작품을 통해 최근 유행하고 있는 빙의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께서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행동자(actant) 간의 삼각모델에서 주체와 반대자 간의 의미 역전이 이뤄진다는 점을 증명해 가며 작품이 서사모델 상에서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통해 작품의 중요성을 설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선택지에 의한 행동과 선택지를 끄고 진행하는 자신의 캐릭터성 구현 가능성은 다른 작품에서 보기는 힘든 이 작품만의 긍정적인 요소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글이 가지고 있는 분석이 현재의 전반적인 로맨스 소설의 변화를 전부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분명하게 부여받고 있지만, 최근의 로맨스물의 경우에는 이러한 희망을 나타내기 보다는 완전한 단절-즉 육체로부터의 죽음을 분명하게 만드는 요소가 들어가는 사례가 좀 더 많이 발견되고 있고, 이러한 사례들에 대한 설명에 이 리뷰가 제시하고 있는 아이디어가 들어맞고 있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께서는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체와 반대자 간의 역할 전환이 서사의 진행을 통해 이뤄져 가는 요소라고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빙의물들의 서술 방식이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빙의물 소설들의 작품들은 이미 서술자의 방향에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 즉 실질적으로 서사구조 내 주체가 ‘나’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빙의물의 결말에서 ‘나’가 원래 주인공이나 관계자에게 막혀 사라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지는 않으니까요. 이러한 주어적 서술이 다른 분야인 환생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러한 반론의 가능성 또한 굳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이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사용했던 방법론이 적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논리의 합치성이 높고,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푸른봄

 최근 인기있는 장르인 “빙의물”을 하이퍼픽션의 장르적 특징과 독자의 역할로 풀어낸 흥미로운 글입니다. 최근 작품들에서 주인공에 빙의하는 게 아니라 주변인물-반동인물에 빙의하는 많은 작품들에 대한 해석으로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도 이 리뷰에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쉑터

 최근 페미니즘 논쟁도 있고, 페미니즘 분류에서도 수많은 계파가 있기에, 심사를 할 때에 어느 것에 맞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난감하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매릴린 옐롬의 서적을 읽었고, <캘리번과 마녀>처럼 마크르스주의 관점에서 정치와 사회, 경제적 요소를 통해 일어나는 문제의 과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심사평을 낼 때, 오렉시스님의 리뷰와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오렉시스님이 무엇을 피력하고 싶은지에 대해 관찰하려 합니다. 저는 백합장르는 일반적으로 잘 보지 않은 편입니다. 본 정도라면 <카나메모>, <유루유리>, <유리쿠마아라시> 정도입니다만, <유루유리>는 성애의 직접적인 행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여중생에게 그런 모습을 강조하는 것조차 상당히 비윤리적일 수 있고, 작품이 일상코미디 장르라는 속성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나메모>는 카나가 근무하던 신문사에 성인여성 친구 두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서로 키스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인공 카나는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고 있었는데, 아직 어린소녀에게 그런 모습은 상당히 충격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리쿠마아라시>는 묘했습니다.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은유적 표현이 느껴졌습니다. 곰이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에서, 육식생물인 곰이 단순히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하기 위해 인간을 먹는다는 관점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포식당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죽은 인간이 되지만, 왜 덩치가 작은 곰이 인간을 잡아먹어야 하는지, 인간 이외에 다른 동물은 없는지 생각하면 단순히 백합(제목에 유리가 있듯이)이라고 칭하는 것을 넘은 은유적 성애를 보이려 한 게 아닐까 합니다. 포식은 어느 여성이 강제로 상대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곰과 인간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로 나뉘는 것이 되겠지만, 서사의 마지막에서 인간소녀는 곰이 되었고, 곰의 여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성적 묘사는 드러나지 않으나 적어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그 뉘앙스만 추구하는 백합물에 성애적 요소를 제거하는 점에서 여성의 연대와 성애를 분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필자분이 제기하는 것이라 봅니다. 과거에도 분명 여성의 성애가 있었죠. 조선시대 궁녀들의 동성애가 적발되어 처벌받는 경우도 있었고, 유럽의 수녀원에도 동성애 관련 글이 있습니다. 물론 남성수도원끼리의 동성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억압되고 통제된 공간에서 생겨난 동성애인 점에서, 그 방식과 형태가 현대사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현대사회에 와서는 상대적으로 과거처럼 동성애자들에 대해 심한 처벌을 부여하진 않으나, 아직 대중적으로 쉽게 열려 있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반사회생활을 하는 심사자 입장에서도 주변에 동성애자, 더욱이 트렌스젠더가 있는지 보통은 알 수 없습니다. 유명인으로는 동성애자로 홍석천씨, 트렌스젠더로 하리수씨 정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동성애는 과거부터 있었던 이야기나, 트랜스젠더는 비교적 최근 들어와 생겨난 이야기입니다. 양성 모두 가진 사람의 형상은 플라톤의 서적에서는 우스꽝스럽게 등장하지만, 막상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중간에 있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괴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최근 어느 고등학생이 여대에 합격하고도 트렌스젠더란 이유로 입학을 포기하고, 변하사는 성별전환 수술로 인해 전역을 했습니다. 이들에 대해 소수자라고 말하던 페미니즘 진영에서 이들을 받아주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일들을 보였습니다. 이는 자신들은 사회적으로 소수자라 말하며 사회적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자신들의 대열에 또 다른 소수자를 받아줄 수는 없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열린사회를 요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들에 대해 열린 자세로 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소수자라는 집단에서도 다수의 논리를 이용하여 그들을 배척합니다.


 개인적 사견이나, 저는 군복무를 제법 길게 했고, 시설물 관리를 했던 사람입니다. 군부대 시설물을 관리하면 당연힌 신축과 철거, 보수와 정비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군부대가 남성중심으로 되어 있어(징병제의 원인) 화장실, 샤워실 모두 남성을 위해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본부건물이나 면회실에 가면 여성전용 화장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시설에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남자들이 쓰던 화장실 내 대변기 1칸을 여성화장실로 교체하고, 덕분에 대변기가 2개인 건물에 남성군인이 쓰는 대변기는 1개로 줄어들죠. 신축공사를 할 때 여성화장실을 만들고, 관련 시설을 만들려면 많은 예산이 소요됩니다. 저 같은 경우 도심지에 부대가 있었지만, 산악지역이나 도서지역에 있는 경우 상당히 많은 문제가 따릅니다. 예산의 소요와 부대 운영까지 크게 문제됩니다.


 가령 사병들이 내무실에서 휴식을 취할 때, 당직사관으로 여성군인이 오는 것이 사병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우며, 역으로 여군부사관 내무실에 헌병 일반(남성)사병이 순찰하러 들어온다면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더구나 육군처럼 야간에도 전방경계를 할 경우 서로 돌아가면 불침번을 서는데, 그때도 문제입니다. 그런 시스템적인 요소에서 어느 누구 한 사람을 위해 부대 내 운영체계나 시설물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전차부대라면 도심지에 주둔하기 어렵습니다)만 변하사나 숙명여대 입학희망생의 일을 본다면 분명 부조리는 존재합니다. 이미 사회적으로 구축된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시설물에서도 이들은 상당한 피로를 느낄 겁니다. 겉모습과 신분증은 여성이지만 염색체를 확인했을 때 XY라 여성화장실 입장불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본인에게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제3의 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하는가? 남성이 여성으로 전환할 수 있고, 여성이 남성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는 남성, 여성으로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생물학적 영역을 넘어 사회적 영역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트렌스젠더는 생물학적 영역을 떠나도 사회적으로 소수자이니 그들도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기존에 소수자라고 말하던 측에서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트렌스젠더는 자신의 몸이 어떠하든 자신이 성적으로 전환된 존재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성은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남성화된 여성, 여성화된 남성, 어째보면 남성도 여성도 아닌 무성(無性)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애자를 보수적 관점이라고 보지만, 저는 생물학적 관점에 더 가깝게 봅니다. 단지 생물 사이에서 동성애가 실제 일어나는 것이고, 그 중에서 인간은 이성적 기능만 가지고 있지 기본적으로 다른 생물과 큰 차이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들은 자신의 성을 전환 하거나 자신의 의지로 다른 성과 성애를 나눌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수술할 수 있는 문명수준을 갖추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생물과 그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차이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애니메이션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란 작품이 생각났습니다. 등장인물 중에 히데요시란 학생이 있는데, 자신은 언제나 남자라고 말하면서 말투도 제법 고풍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학생은 히데요시를 마치 아름다운 여성으로 여기며, 그가 해수욕장에 남자수영복을 입자 수영안전요원이 강제로 전신수영복으로 입혀줍니다. 히데요시가 샤워실을 이용할 때 모두는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 히데요시 전용 샤워실이 목욕탕에 있는 게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사람이 애니메이션 세상의 히데요시처럼 생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납득해주지 않는데, 그나마 공감해 줄 것이라 여기던 사람들에게도 외면당하면 그들의 현실은 더욱 비참해지겠죠. 글에서 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라 하는데, 아마 작가 스스로가 바라는 세상은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현실에 대한 바람이겠죠.



엘리프

 본 리뷰에 대한 엘리프님의 심사평은 공개를 거부한다는 심사위 본인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됩니다.



푸른봄

 ‘백합’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한 논의부터 대중문화의 퀴어 베이팅, 비가시화된 여성과 최근 논란이 된 트랜스젠더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면서도 섬세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쉽게 말하기 어려운 영역에 대한 고민과, 그 고민을 언어로 풀어낸 지점이 흥미롭습니다.






쉑터

 동양세계인 한국에서 집이란 존재는 참으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과거에 집은 인간만이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부엌이나 뒷간, 집의 터에 조차도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신(神)이란 존재가 무엇일까 생각하면, 신이란 한자에서 보일 시(示)자와 첫째 갑(甲)이 합친 단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최고가 신(神)이라는 관점인데, 사실 신이란 인간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왜 사람의 눈에 보이는 최고는 신이 되어야 했을까? 신에서 귀신(鬼神)의 존재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귀신은 인간의 영혼일 수도 있고, 인간을 괴롭히는 초월적 존재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신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조상신(祖上神) 숭배에서 신이란 존재가 귀신이란 존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통적 가치관과 다르게 현대사회에서 집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곳, 태어나서 죽는 곳이 아니라, 이제 재산의 목록이나 거주의 기능이 되는 곳입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이 없거나 거주할 수 있는 도구적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관혼상제를 모두 집에서 지낸 전근대적 사회와 다르게 지금의 집은 그 기능을 모조리 상실했습니다.


 결국 근대화와 핵가족, 가족관계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인간간의 관계성이 점차 덜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자 인간 스스로가 소외하게 되고, 그 소외감에 의해 외로움을 더 심하게 느낍니다. <집이 없어>에서 귀신의 존재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대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귀신이 넘치는 만큼 인간은 외롭고, 귀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수록 그 외로움은 줄어듭니다. 오히려 귀신조차 익숙한 존재라면 외로움에 길들여져 외롭다는 마음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집이란 과연 무엇인가? 집은 한자로 가(家), 우(宇), 주(宙)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주(宇宙)란 단어가 집이란 한자어가 2개가 붙은 겁니다. 집이 우리에게는 공간적으로 우주가 시작되는 세계일지 모르죠. 그러나 현실의 집은 그렇지 못하죠.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은 가족(家族)인데, 가족의 존재성이 곧 혈연관계이던 가치관은 점점 옅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사람의 마음속의 결핍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집이란 물질적인 공간매체를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정신적인 매체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타인과의 관계가 가족 같은 관계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상의 파편이 끊임없이 이어져갈 때에야 서서히 구축됩니다. 하여 “집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집이 생길 수 있다는 희망적 바람은 주인공 스스로가 집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의지가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엘리프

 이 글은 첫 줄부터 자신이 리뷰하는 작품을 왜 독자가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뛰어난 점이 눈에 보기 좋았습니다. 확실히 귀신이 작품에 등장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귀신의 집’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해당 작품을 보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러한 작품의 의미 분석 또한 무난하고 합리적인 전개를 통해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공포와 일상, 일상과 공포가 공존하고 있는 의미분석에서 시작한 이 논고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귀신과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가지는 의미, 그리고 두 주인공의 가까워짐을 통해 같은 동일한 삶의 경험을 겪는 사람들에게서 사회적 연대가 시작된다는 글 속의 이야기 구조는 리뷰 자체에 있어서도 안정성을 가져다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이 리뷰에서는 저희 리뷰 대회의 기준에 맞춰 봤을 때 주관적인 감상보다는 추론과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특징. 글쓰기에 있어서 표현의 독창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만점을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문체가 정돈되어 있고, 비문이나 띄어쓰기 오류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가점을 드리는 점에서 평점을 정리하였습니다.



푸른봄

 ‘집이 없어’에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찾아내는 시선이 좋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배제와 차별로 얼룩져 있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물리적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지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따뜻한 작품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네요.






쉑터

 일상적인 요소, 그러나 다소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는 TV시청자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단지 4인의 남녀 커플이 오타쿠란 점이고, 한 명은 대놓고 오타쿠라고 선전하고 다니나, 다른 세 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사를 나와 자기만의 영역에서는 모두가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충분히 즐기는 부류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아, 그렇지. 굳이 내가 밝히지 않아도 오타쿠 생활을 즐기는데 지장은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민님이 잘 보듯이 작품에서 일상생활은 회사업무, 집, 그리고 연인(친구, 가족관계도 포함) 사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겉보기에 단조롭지만, 알고 보면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런 일상에서 오타쿠란 존재들이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을 주변 여건과 상관없이 보여준다면, 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풀려갈까요?


 인간에게 관계성은 참으로 미묘하게 다가옵니다. 만일 모모세가 니후지가 일하는 곳에 오지 않았다면, 입사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어느 이야기로 갈 수 있을까요? 일상 장르에는 관계성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만들어줄 수 있는 상황적 조건 역시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개성을 소유한 4인이나, 같은 직장에서 선배, 후배, 동료가 되고, 나가서는 친구와 연인이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점은 일본에서 오타쿠란 사람들이 제법 사회에 많이 녹아들어갔고, 그들도 나름 일상생활에서 다른 일반인과 비교해도 특별히 문제없이 잘 지낸다는 점입니다.


 오타쿠가 일반인과 비교하여 다소 특이하고, 연애라는 인간의 보편적 행위에서는 다소 서툴러 보일 수 있지만, 그들도 사랑을 느끼고 하고 있는 사람이란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인이라도 연애는 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요. 일반인 사회에서 비일반적인 개성을 가진 오타쿠들이 모인다면 당연히 시트콤 같은 장면이 나오고, 등장인물의 개성이 빛나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엘리프

 이 리뷰는 저자께서 <오타쿠에게…>를 좋아하게 된 이유나, 작품의 내용을 잘 다루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내용을 읽고 생각해보니 이 작품 또한 클리셰들을 통해 형성되어 있는 느낌이 들지만, 리뷰를 통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리뷰가 다른 리뷰에 비해 크게 주목 받을 수 있는 점은 작품을 혼자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소통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견이 형성되고 있는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웹컬처(서브컬처)의 경우 한 작품에 대한 개인의 의견은 순전히 개인의 영역인데,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이야기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보입니다. 개인의 인상이나 근거가 명확하게 정리된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 구어적인 단어를 쓴 것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습니다. 또한 표현의 사용에 있어서 다른 독자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단어가 쓰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감정선’이라는 단어처럼 서브컬처에 대한 지식이 있더라도 젠더적 해석에 따라 이해도가 떨어질 단어를 그대로 설명 없이 서술했다는 점은 본 대회의 기존의 심사 경향을 볼 때 마이너스가 될 부분이 있습니다. 띄어쓰기나 글의 흐름 부분에 있어서 어색한 부분들이 상당히 있어서 비문 부분에 있어서 감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던 점은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정리가 됐다면 좀 더 좋은 평가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푸른봄

 다른 작품들에 매력을 못 느끼던 글쓴이가 이 작품에 매력을 느낀 이유를 한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민은 사실 철저하게 개인화된 취향이 일반화된 21세기에 보다 많이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글 쓴 분의 작품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가볍지 않은 이유입니다.






※ 본 리뷰의 심사과정에서 심사위 쉑터님은 리뷰에 점수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여 다른 두 심사위가 부여한 점수의 평균점수를 쉑터님의 점수로 반영하였습니다. 이는 쉑터님의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 본 리뷰는 정식 수상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본 리뷰대회에서 요구하는 심화리뷰 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비평을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만큼 리뷰의 수준이 높고, 심사위가 쓴 글을 직접 비판의 도마에 올리고 있는 만큼이나 도전적인 글입니다. 또한 리뷰에서 말하는 내용이 리뷰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다른 리뷰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장기적인 비평을 염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 진행자의 판단 하에 본 리뷰를 응원상에 선정합니다.


 


쉑터

 사실 리뷰를 읽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 이름이 주석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회에서 활동할 때 제가 작성한 논문 중 2번째 주제가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였습니다. 가끔씩 논문과 관련하여 검색하다 보면, 제 논문이 다른 분들의 논문에 인용되는 경우를 종종 봤습니다. 주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존 할라스의 애니메이션 <동물농장>으로 제작되면서, 관련 연구에서 확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논문이 직접적으로 다른 분의 글에 의해 비판의 도마에 올라간 것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글을 적은 분의 리뷰를 보며, 제가 다시 심사평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도 아이러니 합니다. 솔직히 심사평 초반에도 언급하나, 저는 이 글에 대해 평점을 내리지 않으려 합니다. 공정성 문제가 있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글에 대한 심사를 넘어 제가 논문 쓸 때에 어떤 관점에서 적었는지, 또한 논문작성분량에 따라 어떤 내용이 제외되고 축약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상황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는 21세기 일본애니메이션 역사에서 큰 획을 바꾼 작품입니다. 각본가의 서사능력과 애니메이션감독의 영상기술이 합쳐져 그 효과가 매우 컸던 작품입니다. 그만큼 많은 반응들이 나왔었는데, 서사 안에 내포된 담론의 영역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마법소녀는 모두 마녀가 되고 마녀가 되지 않은 마법소녀는 살해당하니 마법소녀는 희망의 존재이기보단 희생의 존재이다.라는 명제를 통한다면 간단히 끝날 이야기이나, 잡념과공상님은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서 대속(代贖)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속적 기능을 언급하는 것에서 다소 필자의 종교적 가치관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글에는 자신만의 관점도 확실히 있습니다. 


 저는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환경이란 영역에서 계속 일을 하니, 물질적 이동에 큰 관심을 둡니다. 환경에서 지구환경시스템의 파괴는 인간에 의한 생태계파괴, 각종 오염물질 발생, 자연 내 오염물질 한계수용의 파괴점이 결국 인간 스스로를 병들게 만드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큐베가 절망의 기운이 가득 찬 그리프 시드를 흡수할 때, 막대한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마법소녀가 많이 나와 마녀를 많이 사냥하고, 다시 마법소녀가 마녀로 변하여 똑같은 상황이 재생산될 경우에는 더욱 좋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에너지에 대한 부분을 생각합니다. 기초 생산력과 관련하여 태양의 에너지에서 식물은 약 44%를 받아들이고 여기서 나머지 40%는 호흡으로 소실됩니다. 1차 소비자인 초식동물은 식물이 받아들인 에너지의 20% 정도만 이용하고, 여기서 10%의 에너지만 흡수합니다. 하여 고차 소비자인 육식동물은 또 다른 비율로 에너지를 흡수해 이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초 태양에너지가 지구에서 먹이사슬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인간에게 가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여기까지 올 때 사라지는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모든 게 에너지입니다. 석탄과 석유도 태양에너지를 저장한 동식물 사체로부터 오랫동안 시간을 축척한 셈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단순히 소모합니다.


 에너지의 소모는 그만큼 자원도 고갈시키고, 자원의 고갈은 인간의 경쟁의식을 촉발시킵니다. 자연의 수용능력 이상으로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면, 결국 자원을 두고 인간무리끼리 투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큐베는 인간의 문명이 있을 때부터 자신들은 있었다고 말합니다. 문명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파괴하여 거기에 인간의 노동력이 투여된 공간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문명은 없으며, 문명이 있으면 그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문명은 존재해도 의식은 여전히 미개합니다. 문명에게 닥치는 문제는 인류문명의 부산물인데도,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대속의 기능으로써 많은 죄 없는 소녀들이 희생되어 왔고,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서도 많은 마법소녀들이 희생되어 왔습니다. 마법소녀의 희생은 인류문명의 시작과 끝이라고 작품은 보여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법소녀가 없어도 되고, 마녀가 희생되지 않아도 될 세상이라고 해도, 그런 마법소녀와 마녀를 있게 만들어버린 인류문명의 영역에, 신이 된 마도카가 개입할 수는 없는가? 마도카가 만든 세상에는 마수가 등장하고, <반역의 이야기>에서는 호무라가 악마가 됩니다.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다면,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피해를 악마의 탓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죠. 피해는 마법소녀와 마녀만 보는가? 아니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 일반인들도 포함될 수 있는가? 작품을 보면 호무라가 마수를 사냥하는 것으로 나오나, 막상 <반역의 이야기>에서는 호무라는 마녀가 되기 전 봉인된 상태에서 악몽을 꿉니다. 자신의 악몽이 마녀가 만든 세상이 된 것처럼 말이죠. 큐베가 원하는 에너지의 회수는 인류문명의 이기심이고, 그것은 대다수 군중이 인정하는 의식입니다. 그들의 이기심에 마녀가 나오고, 그들이 다시 마녀에 의해 고통 받는 풀리지 않은 순환 고리가 있다고 봅니다. 마도카는 모든 마법소녀의 업보를 가져갔지, 모든 인간의 업보를 가져가지는 않았습니다. 대속적 기능에서 마도카가 이룬 것은 마법소녀만의 영역이지, 그것이 인류 그 모두에게 간 것은 아닙니다.


 한편 제 개인적 관점에서 마도카가 신이 되어 세상을 완벽히 재창조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고, 마도카는 관념의 세계에서 존재하여 전혀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이신론(理神論)적인 요소로 보여집니다. 대속적 기능이 어떤 사회나 민족, 국가, 인류의 거대한 의식이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마도카의 대속은 인류의 문명이 해결할 수 없는 현재진행형인 셈입니다. 저는 논문을 썼을 때 <반역의 이야기>를 미리 봤다면 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호무라가 악마가 되자, 큐베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문명에서 나온 부산물인 인간의 집단이기심을 합리화해주던 큐베, 인류의 재앙적 요소가 인류 스스로에 의해 기인했던 세계관에서 악마 호무라의 탄생으로 다른 방식의 세계관이 탄생됩니다.


 마법소녀들은 마녀를 사냥해야하는 명분이 제각기 다릅니다. 정의를 위해, 복수를 위해, 개인의 실익을 위해 등등 말이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에너지 소모능력은 재생산할 수 있는 기간에 비해 너무 과대합니다. 비평 마무리에 언급되는 “모두의 소원을 절망으로 끝내지는 않겠어, 모든 인과는 모두 내가 받아줄게.”에서 인과의 원인은 인간사회의 부조리입니다. 부조리에서 기인된 부정적인 사고가 세상을 병들게 합니다. 어찌보면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 신의 탄생보다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는 세상입니다. 애니메이션은 현대사회의 하나의 신화라고 봅니다. 인간 스스로가 옳지 않은 삶을 사는데,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아주고, 그 혜택이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죠. 아이러니한 점은 자연에 쓰레기를 마구 버려도 자신이 먹는 음식은 신선해야 하고, 여기저기 개발하여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신이 사는 집은 조용해야 하고 공기도 맑아야 하는 점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사회의 갈등과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문명의 갈등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원인이죠. 그러나 그런 갈등의 시대에 태어난 인간은 스스로가 그것들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 사회적 구조에 의해 스스로 동화되어 갈등에 대한 폭발물로 다가오죠.


 이런 사고들은 작품에서는 마녀의 행위로 간주됩니다(문제의 원인보단 그 문제를 일으키는 마녀에 초점을 두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런 문제들은 결코 해결될 리가 없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소녀가 스스로 절망하여 마녀가 된다는 것은,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세상은 절망스럽고 그 절망을 벗어나려면 신적인 힘을 가진 대속적 존재가 되기 위한 마도카의 순수한 이타심이 필요하다고 이 글을 보고 느껴옵니다.


 그리고 저는 마법소녀의 이기적 요소를 생각했는데, 타인을 위한 행동 역시 이기적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쿄코의 아버지가 보인 행동에서 쿄코에게 아버지는 타인이라 하기엔 너무 관계성이 깊고, 아버지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일 수 있기에 마법소녀가 된 과정에 이기적 요소가 있다고 봤습니다. 단지 그것으로 인해 처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야카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지내나 나중에 절망하여 마녀가 되고 맙니다. 타인의 존재성을 어디까지 봐야할까? 친구와 가족은 어느 정도 타인이어야 할까? 혹은 마법소녀 자체도 타인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마법소녀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보인 기상현상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일을 하다보면 도심지 고층건물로 인한 미세한 기상 변화가 큰 이슈가 되기 때문입니다. 집이 흔들리거나, 돌풍이 불거나 그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서 보여준 마녀의 장난 정도의 위력은 아니나, 환경적 재난을 볼 때마다 정말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이는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도심에 고층빌딩은 계속 올라가고, 사람들은 그 주변으로 모입니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에서 마녀와 사역마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등장합니다.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에 의한 문제가 일어나니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잘못을 돌려야 할까요? 마도카의 대속적 기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인간이라면, 이 작품을 재미로만 볼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엘리프

 우선 이 논의는 대속에 대한 기존의 학술적 논의에 대한 도입부분이 없이 곧바로 애니메이션 미디어 분석을 통해 의미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이 논문의 깊이가 학술논문으로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사전문헌 분석이 좀 더 되었어야 할 부분이겠습니다.


 그러한 논의가 되어 있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논고는 이 애니메이션 이후에 진행되었던 후속편과 같이 볼 때 그 의미가 줄어듭니다. 후속편에서 마도카가 재생성한 ‘마물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다시 마녀가 나타나는 장면은, 마도카의 ‘대속’이 완벽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특히 제가 이 논고에서 우려하는 점은 이러한 사전 논의의 부재로 인하여 콘텐츠 분석 이후 결론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제시하는 애니메이션이 기독교의 대속, 또는 속죄 개념을 다루고 있는 만큼, 파스카(또는 유월절(페사흐))까지는 다루지 않더라도 대속의 기존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저자가 도출한 ‘대속’ 개념이 왜 그 기존의 논의와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루었어야 했습니다. 기독교의 대속 개념은 동물 제물들을 한 번에 대체한, 참 신이자 참 사람인 예수라는 존재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다시 말해, 마도카가 기존의 대속 개념의 실현에 필요한 ‘참 신이자 참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논고는 그 질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은 듯이 ‘원죄’를 ‘신화’로 이름붙이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변영권 목사님의 단순한 논의를 찾아내자마자 ‘매우 적절하게도’라는 평가를 붙이면서까지 아전인수하는 과정은 부적절했다고 보입니다(제 의견을 밝히자면, <마마마>는 기독교의 대속 이야기를 복사해 그 자리를 덮어씌우려는, 상당히 ‘도전적인’ 스토리입니다).


 또한 중간에서 논리학적 수식을 사용했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수식의 근거와 함께 각 수식의 의미, 수식에 대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다듬어서 논문이 완성된다면 학회지에 투고해도 괜찮을 것으로 보입니다.

 


푸른봄

 마법소녀라는 주제를 ‘대속’과 연결 지은 점은 흥미롭습니다. 다만, 작품 속 대사 외에 작품을 바탕으로 주장하는 바에 대한 논거가 조금 아쉽습니다. 필자가 밝힌 대로 ‘대속의 서사’로 해석한 경우가 거의 없다면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 비수상작을 포함한 모든 심사평은 애니큐어 공지사항 첨부파일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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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Comments (2)
  • 운영하여 주신 애니큐어 분들과 심사위원분들 그리고 참여하여 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다시금 좋은 기회로 만나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이미지는 가운데 정렬로 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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