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리뷰부문응모] <고블린 슬레이어> 고블린을 밟고 올라선 갑옷



1. 데포르메의 해체




 데포르메의 해체를 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다. 내가 <고블린 슬레이어>에 강렬한 첫인상을 가졌던 것은 이 작품 역시 그런 쪽에 속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데포르메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만화적인 그림 기법을 의미하는데, 실제에 가깝게 그리기보다는 실제에서 일정한 것들을 생략해 귀엽고 예쁜 그림(주로 인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데포르메란 생략 기법이며, 목적은 보고 싶지 않을 만한 것들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기분 좋은 예쁨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데포르메는 '서사적 데포르메'다. 서사에는 기본적으로 데포르메가 일어난다. 서사란 무언가를 그대로 비추고자 하는 거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작된 것이고, 실제를 오려내 엮어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무언가는 부각되고 무언가는 생략된다. 가령, 대중적인 서사에서 똥과 오줌 같은 사람의 당연한 배변 행위를 생략하는 것은 잦은 일이다. 나온다고 해봤자 유머 코드로 등장할 뿐이다. 신데렐라든 백설공주든 왕자님을 만난 걸로 인생이 끝난 건 아니지만 서사는 거기서 끝난다. 그 이후 세세한 성격 차이 때문에 잦은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든가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운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법하지만 동화라는 이름으로 보여 주고 싶은 서사는 아니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것이 설령 전투를 메인으로 삼고 있다고 하더라도, 리얼한 잔혹함은 생략된다. '배틀물'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그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체력바를 깎으며 싸우고, 상처는 간략한 선들로 표현되고, 피는 흘러넘치지 않으며, 사지는 절단되지 않고, 관통상은 너무 흉하지 않은 선에서만 생긴다. 그런 합의를 넘어선 것들이 오히려 '잔인하다'라는 타이틀을 얻고, 그런 취향의 작품으로 분류된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 암묵적인 합의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런 작품이 그렇듯이 첫 화에서부터 보란 듯이 합의를 깼으며, 자신이 그런 합의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작품은 주로 두 가지 예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이 작품이 그저 피를 유희하기 위한 일종의 '고어물'일 것이라는 예상.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이 데포르메라는 생략의 벽을 넘어 무언가를 '고발'하려 한다는 예상. 나는 <고블린 슬레이어>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가지, 당부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건 이 작품에 품었던 '첫인상'이다. <고블린 슬레이어> 1화가 그리 의도적으로 잔혹했던 것, 고블린이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을 굳이 강조했던 것은 '나는 이런 서사다'라는 선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절망적이고 끔찍하며 흉한 것들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겠다'라는 선언이었다. 나는 그런 서사를 의심하기보단 기대하며 시작한다. 그것은 방어기제를 벗어던진 진솔함일 수도, 부조리한 세계(실재)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블린 슬레이어>가 그 기대를 충족시켰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신이 주사위를 굴리는 세계




 <고블린 슬레이어>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TRPG를 암시한다. 주사위를 굴려서 결과를 만드는 방식, 각자의 독특한 직업과 종족과 싸움 방식을 가지고 모험을 떠난다, 그런 모험가들이 길드에 모인다는 편리한 설정, 거대한 악(마신)이 있고 거기에 맞서는 용사가 있다 등등. 여기서 TRPG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물론 주사위다. 플레이어(신)가 주사위(운)를 통해 결과를 만든다. 서사 속의 인물들은 그저 '말'에 불과하다. 주사위의 결과에 따라, 신의 유희거리로서 움직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몰입했던 이 '인물'들의 입장에 서본다면 이들은 스스로에게 살아있는 사람이며, 그들이 딛고 있는 게 그들의 유일한 세계다. 그들은 '삶'을 살아간다. 우리(플레이어, 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교차가 일어난다. TRPG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은유가 된다.  우리는 분명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신이나 그가 던지는 주사위를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당연하다. 애초에 그런 이미지는 은유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결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원리로 돌아가며, 수많은 것들이 운에 맡겨지고, 그 너머에 운의 근원이라고 할 무언가가 있는지 결코 관측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현대의 물리학이라 할 수 있는 양자론 역시 이런 사고방식을 강화한다. 양자론까지 갈 것도 없이,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태어난 건 순전히 운이며(불운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지금 이 순간에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 어이없는 이유로 죽는데 그 주인공으로 당신이 발탁되지 않은 것도 순전히 운이다. 당신이 교통사고의 위험에 민감할 수도 민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로 죽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며, 별로 조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고 한 번 없이 무사히 살다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확정되는지 우리는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우리에게 그것은 무지의 베일에 감춰져 있고, '우연'이라 불린다. 즉, 세계는 운에 의해 운동한다. TRPG 게임판처럼.


3. 고블린의 상징성



고블린은 초록색 달로부터 왔다고 한다. 초록색 달은 영어로 Green Moon, GM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고블린, 그리고 고블린 슬레이어다. 그런데 고블린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잡졸이다. 그래, 우리는 이것들을 초보자가 거쳐가는 경험치 덩어리 같은 느낌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고블린에게 죽는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고블린은 여성을 강간한다. 그렇기에 어떤 여성은 고블린에게 강간 당한다. 고블린에게 강간 당한 여성은 반드시 있다. 고블린이 세계를 멸망시키거나 구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설령 용사가 마신을 처치해 세상을 구원했다고 한들, 어디에선가는 고블린이 여전히 '어떤 여성'을 강간하는 중이고, 어떤 마을을 약탈하는 중이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비통에 가득 차 죽는다. 마신의 절대적인 마법에 죽든, 고블린의 곤봉과 단검에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죽든, 고블린에게 강간 당한 후 견디지 못해 자살하든, 죽음이 죽음이라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고블린은 악의 화신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세계를 통째로 뒤흔드는 악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블린에게는, 그리고 이 세계의 고블린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다. 이들은 상대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결코 세계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은 못 된다. 하지만 마을을 약탈하고, 살기 위해 숨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에게 그 아이의 누나가 강간 당하는 걸 보여주기에는 적합한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개별적인 삶을 송두리째 박살 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고블린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마물들과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때문에 고블린 슬레이어는 고블린을 죽인다는 간단한 행동 원리에 지배돼 있으면서 다른 마물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있어 고블린은 자신을 파멸시킨 악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자신의 정체성이다. 고블린에 의해 완전히 박살 난 삶은 고블린의 바깥에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 스스로도 고블린이 된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에서도 나를 들여다본다 했던가? 흔한 이야기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고블린을 죽이기 위해 고블린처럼 상상했고, 고블린 같은 사고방식이 가능해졌고, 그런 일들이 심지어 즐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고블린을 마주할 때 그 누구보다 고블린답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블린에 대해 회의 없는 분노를 가져야 하고, 동시에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를 고블린으로 만든 것은 고블린(선생)이다.





1) 신보다 정의롭고 사신보다 사악하며 부호에게는 필요하지만 가난뱅이에게는 사치인 것. 그것은 무소유(何も無い)다. 2) 녀석은 언제 어디서나 네 앞에 나타나고 절대 널 놓치지 않는다. 넌 그 녀석과 대화조차 할 수 없다. 봐라, 왔다! 네 옆이다! 포기해라! 그것은 죽음(死)이다. 3) 내 주머니에는 뭐가 있지?

고블린 슬레이어는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는 그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블린 선생의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블린 슬레이어가 위기의 순간에 '내 주머니에 뭐가 있지'라고 되풀이-자문하며 확정된다.

고블린의 주머니에 있는 것, 그것은 고블린만 알 수 있다.




4. 고블린 슬레이어, 신관, 하이엘프

―이미 피웅덩이 속에 산산조각 난 알, 깨짐을 시험받는 신앙의 알, 깨짐을 넘어서려는 모험의 알





 고블린 슬레이어의 평범한 일상은 오래전에 박살 났다. 그가 겪어볼 수 있을 만한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지만 기존의 방향성과 가치관은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하여 화살표는 고블린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세계를 겁탈한 악마에 분노하라!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명령이다. 그는 처참하게 깨진 알이다. 피웅덩이 속에서만 그 파편을 찾을 수 있어 그 속에 머무른다.




 신앙으로 가득 차 막 모험을 시작하려던 15살 여자아이는 첫 모험에서 전멸한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구해져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로 남은 건 파티 중 자신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버리는 일도 없다. 그녀의 알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를 뒤집어쓴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알은 고블린 슬레이어처럼 깨질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알이 고블린 슬레이어의 알을 수복할 것인가? '신앙'과 '순수함'은 지켜지는가?





 얼핏 모험처럼 보이던 고블린 슬레이어의 고블린 죽이기는 모험이 아니었다. 하이엘프는 그 사실을 밝힌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모험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세계를 부순 악마를 철저히 짓밟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분명 위험이 있지만, 위험한 작업장에서의 위험일 뿐이고, 새로움에 대한 동경이나 미지를 마주한 설렘 같은 건 전혀 없다. 실제로 고블린 슬레이어의 싸움 방식은 종종 '작업'에 가깝다. 그것은 이미 '전투'라는 이름을 상실했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저 고블린 시체 속에서 마모되어 가는가? 그럴 수는 없다. 하이엘프는 모험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한다.



5. 상처 입은 소년상


 지금까지 이 작품의 주요한 구조들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내가 1번에서 말한 기대는 위의 것들로 충족되었을까.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나는 이 작품에 서려있는 인간상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말하려 한다. 내가 보는 것은 고블린 슬레이어 너머의 움츠러든 소년이다.

 소년이 상처 입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실재에 대해 알고 있다. 세계가 주사위 놀음처럼 굴러간다는 것, 용사가 가슴 벅찬 서사를 써 내려가며 세상을 구할 때 어딘가에선 고블린이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다는 것, 모든 걸 잃은 채 고블린을 죽일 뿐이라면 스스로의 모습도 고블린과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 입은 소년은 엉망진창이 된 갑옷에 철저히 둘러싸여 있다. 자신의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다만 '고블린 슬레이어'로만 존재한다.

 다만 고블린 슬레이어는 악의 화신이 된 고블린을 억척스럽게 학살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너무도 단단하다. 그는 더 이상 정신분열을 일으키지도, 주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나약한 모습으로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는 고블린 슬레이어라는 강인하고도 단단한 갑옷이 된 것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 이상의 해체, 깨짐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깨진 알이 수복되어가는 이야기이다. 갑옷을 벗고 외부와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1번에서 말한 데포르메의 해체조차 거부된다.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데포르메의 해체로부터 지켜진다. 그들은 흉해 지지 않는다. 흉해지는 건 엑스트라나 고블린들뿐이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어마어마한 상처를 지녔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으로 끝없이 멋있다. 설령 그가 고블린 챔피언의 무기에 맞고 한 방에 날아가 벽에 처박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는 사지가 엉망진창으로 부러져 울부짖지 않는다. 자신의 울분을 떠올리며 돌아와 상대보다 더한 악의 모습으로 되갚아 줄 뿐이다.




 난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블린 슬레이어라는 것은 상처 입은 소년이 바라는 자아상이지 않은가?".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은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런 걸 바라기엔 이미 여기 있는 나는 상처 입었고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의 상처를 누군가 봐주길 바라고, 나아가 자신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 세계와 화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에게 찾아왔던 해체(주사위)마저 극복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해온 일들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 준 사람들을 통해. 마치 고블린 슬레이어처럼.







6. 미추美醜―자기극복 또는 자아도취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미 한 번 무너졌던 소년이 힘겹게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하는 이야기인가? 다른 사람과 마주하고, 그들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바라보고, 그들을 구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구원받고, 그래서 이미 잃어버린 과거의 꿈인 모험을 다시 말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이야기인가?

 분명 이것은 그런 이야기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 화 고블린 슬레이어와 신관의 말에서 울림을 얻었던 것이다. 하지만 각도를 조금 바꿔 보면 이것은 마치 자위 같은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소년이 추앙하는 자아상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 말이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런 조건 역시 잘 갖추고 있다.

 동시에 이 작품에 드러나는 여성의 역할을 보면 그런 의심은 증폭된다. <고블린 슬레이어> 전반에서 중요한 패닉을 담당하는 건 전부 여성이었다. 신관이 그랬고, 신관의 파티원이었던 격투가가 그랬고, 하이엘프가 그랬고, 검의 처녀가 그랬다. 반면에 힘에 대한 상징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고블린이 그랬고, 은 등급의 남성 모험가들이 그랬고, 고블린 슬레이어가 그랬다.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리자드맨이나 드워프는 하이엘프 같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중요한 순간의 패닉은 여성상에서만 일어나는가? 여성상이 무너짐을 담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남성상이 힘을 담당하는 이유는? 이러한 특징은 캐릭터의 외모적인 면이나 그 외모를 비추는 카메라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여러분도 두 눈으로 봤듯이.

 <고블린 슬레이어>는 결국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모습이다. 한 쪽 면에는 미, 뒤집으면 추가 있다. 이 동전을 튕겨 올렸을 때, 여러분에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12화 분량의 애니메이션(라노벨과 코믹스는 분명 애니메이션보다 많은 분량이 있다)을 가지고 작품 전체를, 나아가 작가를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손에 떨어진 동전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는 거야 각자의 몫이지만 편의적인 편집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본 것을 이 지면에 최대한 많이 드러내 놓으려 했다.


7. 해체-그러모음


 현대의 일본 서브컬처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와 그에 따른 허무가 많이 비친다. 그리고 그런 식의 해체를 드러낸 서사에는 실존적 반박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허무주의처럼 보였던 것들이 알고 보면 상당수 허무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모험가적인 동경과 사랑으로 실존을 찾는 움직임은 로맨티시즘이라 불리기 마땅하며, 그런 이유에서 서브컬처와 잘 어울린다.

 <고블린 슬레이어>도 고발로부터 시작했다. 이 세계는 신들의 주사위 놀음이나 다름없다! 어딘가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든, 어딘가에선 눈을 돌리고 싶을 뿐인 추한 서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근대적 믿음을, 언뜻 보기에는 단단하고 안전해 보였던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행위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생기를 잃고 허무병을 일으키는 시궁쥐가 됐기 때문에, 이런 해체의 행위는 일어난다.

 그리고 <고블린 슬레이어>는 결국 모험의 순풍을 불러들이며 이야기를 마친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자신이 구했던 소녀로부터 자신이 주사위에 놀아나는 게임 말이라는 것을 부정 받는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투구를 벗고 세계와 마주함으로써, 누군가를 구하고 그 사람에게 구원받음으로써 허무에 저항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고블린 슬레이어>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 경우를 말하자면,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대답이었다. 1화에서 4화까지 보여준 것이 불러일으킨 기대에 비하면 얕은 이야기였다. 앞부분에서 보여준 것에 어울리려면 해체는 더욱더 일어나야 했고, 인물은 더 처절해져야 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모험을 끌어내야 했다. 그랬다면 나도 이 작품에서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자아상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8. 마치며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블린 슬레이어>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동시에 서사적인 힘이 강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는 재밌는 작품이다. 만약 TRPG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을 추천해 보길 바란다. 웬만해서는 재밌게 볼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전부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렇게 지면에 제목을 붙여 드러내 볼 수 있을 만큼 굵직하게 느껴진 게 있는가 하면,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느끼지 못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도 충분히 음미되었으면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혹시 인물의 이름을 단 하나라도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이름은 제대로 고유명사인가? 혹 별명은 아닌가? <고블린 슬레이어>는 인물이나 도시 이름을 말할 때 개별적인 고유 명사가 배제되어 있다. 고블린 슬레이어, 신관, 무스메, 길쭉귀, 드워프, 검의 처녀, 접수원, 물의 도시 등등. 이 익명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TRPG와 엮어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엮어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꾸준히 등장하는 소꿉친구와 고블린 슬레이어가 살았던 마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있어 그곳은 고블린에게 습격 받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진 곳이다. 하지만 무너지기 전의 자신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지키고 싶었지만 지킬 수 없었던 곳이다(그래서 애니메이션 마지막에 해당하는 전투는 그 마을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그곳에는 지박령 같은 망령이 있다. 그리고 소꿉친구는 그곳에서 고블린 슬레이어를 기다린다. 그가 고블린 슬레이어의 갑옷을 벗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5, 6, 7을 통해 말한 것도 의심해 보길 바란다. 나는 '추醜'에 결국 더 무게를 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과연 타당한 의견인가? 혹 필자는 남성향 서브컬처라는 카테고리의 전체적인 문제를 <고블린 슬레이어>라는 개별적인 작품의 문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고블린 슬레이어>에 대해 이런 자세를 견고히 취하고 나면 다른 거의 모든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상을 품게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나는 <고블린 슬레이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울림은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실망했으며(기대가 상당히 컸다), 앞으로의 전개에 꽤 많은 의심을 품어야 했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기세 좋게 찔러 들어왔으나 결과적으로 얕았다. 또는 빗나갔다. <고블린 슬레이어>가 찔러온 검은 고블린을 관통할 뿐이었다. 그 외에는 관통하지 못했고, 나도 관통 당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아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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