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리뷰부문응모] 진부한 사랑의 울음과 뒤따르는 상승의 에너지 ~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내외적 형식 재현에 관하여



1.



평소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신기한 이름이 될 수밖에 없다. 먼저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만을 두고 보면, 여러 매체에서 원용했기에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퇴역군인과 PTSD 장애를 끌고 왔다. 이는 <지옥의 묵시룩>과 같은 영화처럼 정글이라는 드센 배경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캡틴 아메리카>처럼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이때 그런 매체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퇴역군인이 캐릭터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재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퇴역군인이라는 캐릭터성보다는 어느 장르에 배치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졌다. 공포 장르라면 PTSD를 겪는 이의 악몽이 현실에 침입해오는 과정을 공포스럽게 그리는 식이다. 말하자면 퇴역군인에 따라붙는 PTSD라는 병명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었다.



사실 이보다는 먼저, 퇴역군인 캐릭터가 어디에서 근원했는지를 알아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국의 매체에는 퇴역군인 캐릭터가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그렇게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건국의 역사가 짧으면서도, 그 짧은 기간 안에 급격한 확장을 겪은 나라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군인이 필요했고, 정규가 아닌 독립된 형태로도 카우보이와 같은 것이 존재했다. 그러니 퇴역군인 캐릭터의 계보가 1910년대의 서부 영화로부터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사회로 돌아와서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은 보안관이나 현상금 사냥꾼과 같은 무력을 쓰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서부영화에서 그렇게 돌아온 총잡이들이 다시금 어딘가로 떠나가버렸다는 점이다. 전쟁의 기억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이 그들은 떠나간다. 어쩌면 이는 구원받지 못하는 영혼이라는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전장으로 나갔다가 사회로 돌아온 이들이 마주한 자기 정체성의 유령화가 그런 유령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군 생활을 한 젊은이들도 잘 알듯이, 2년 정도를 군대에서 생활하고 사회로 돌아오면 그 사회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는 유학이나 여행이라던가 하는, 잠시 현실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도 동일하게 겪는 일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기억은 PTSD라는 병명을 달고 온다는 점에서 개인의 탈신체화를 가속한다. 예컨대 군인이라는 유령은 돌아갈 신체 없이, 사라진 전장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사라진 신체에 해당하는 건 몸이라는 것뿐만이 아닌, 자신의 수족과도 같았던 관계가 차분히 사라질 때의 풍경을 포함한다. 그래서 PTSD의 성격은 잘려나간 사지에서 고통을 느끼는 환상통과도 일련의 연관을 가지게 된다.



말을 고쳐 잡자면, 군인이라는 캐릭터에서 추출한 이 도식이 추출을 거치고 나면 여타 다른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 다소 흥미롭다. 위에서 다른 사례를 하나 들었는데, 이것이 일차적인 면에서 군인의 감정과 동일시될 수 없다면, 추출을 거친 이차적인 면에서는 전장이라는 것으로 동일시될 수 있다. 전투에서의 전장이 육신의 죽음을 곧바로 선고하는 것이기에 위협이 된다면,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예를 들면 회사를 전장에 빗대고 회사원을 전투원에 빗대는 이들에게 정장이란, ‘전투 정장’이라는 군복이 된다. 그런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건, 전투할 수 없는 군인이기에 무능한 것이 된다. 이는 회사 가기를 싫어하면서도 회사에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나간다는 이유가 있지만, 제 본분을 하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사회적 책임이 마음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전쟁과 군인이라는 생소한 소재가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유가 그런 점에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이때 타인의 고통보다 더한 것은 자신의 고통이고, 심지어 어떨 때는 타인이 가장 큰 지옥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지옥의 한가운데에 내쳐져 있던 이들이 지옥의 바깥으로 밀려났을 때, 고통이 자신의 제 역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의 바깥에 희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고통의 바깥에는 더 큰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르게 말해서 희망은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즉, 모든 악몽이 빠져나가고 마지막에 남은 게 희망인 이유는 그게 최후의 통첩이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총아여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전장에서 돌아온 이들은 자신이 긴 고통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온 곳은 자신이 본래 보존하던 희망이 파쇄된 고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것은 무엇보다 큰 절망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또는 타인이 겪는 그런 절망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총잡이들은 선인에게 자비롭다.)



요약하자면, 여정을 거친 자신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출정시의 신체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현실,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돌아올 때까지의 손실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유학이든 여행이든 간에 다들 그런 것을 감안하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이는 교도소라는 사회와의 분리가 왜 가장 보편적인 형벌인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류 신체로부터 분리된 것이 제때에 복귀하지 않으면 출발지점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해버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 될 수도 있지만 온전한 망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군인에게는 후자인 경우가 더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쟁이라는 건 상대를 죽이는 게 최우선 과제인 ‘업무’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물리적으로 이어진 여러 형태의 신체가 손실이나 파손을 겪는데, 크게는 삶의 터전부터 작게는 자기 신체의 일부까지도 다양하다. 허나 다수의 매체에서 초점을 맞추는 건 관계의 손실이다. 관계란 근본적으로 감정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드라마를 만들기에는 좋은 재료가 된다. 무엇보다 영상이나 글로 쓰여진 매체가 흐름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것이 출발한 지점과 안착하는 지점의 신체가 다르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2.



신체와 작품의 관계를 그릇이라는 점으로 동일선에 놓아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허나 배우라는 측면으로 보면 그게 꼭 틀린 말인 것만은 아니다. 선남선녀 배우들의 외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외모에 대한 숭배가 다비드와 같은 조각상처럼 형상에 신체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음을 고려해본다면,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제공하는 물성은 미(美)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어떤 애니메이션은 성 상품화라는 인간의 본원적인 길에 들어서기도 하지만, 큰 범주로 바라본다면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기에 현실에서 할 수 없는 미학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즉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여러 종류의 판타지이다. 성적 판타지처럼 아주 단순한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이 있기도 하고, 단순한 선남선녀처럼 소위 말하는 ‘외모’에 대한 선망을 담기도 한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라는 존재는 그 무엇보다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는 작품과 별개의 존재로 취급되는 경우가 잦다. 영화라면 배우가 작품에 귀속되는 ‘무대 위’의 형국을 취하겠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란 별개의 독립된 생명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피그말리온이라는 전통적인 신화의 한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여기서 중점은 현실에서 수행되지 못할 미의 임무가 그들에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로 대표되는 게 전투미소녀라는, 소녀와 군인이라는 두 개념의 이질적인 조합이다. 여기서 전투미소녀라는 게 왜 등장했는지를 고려해보면 복잡한 분석 없이 가장 단순한 결론을 내려볼 수 있는데, 아름다운 소녀가 잔혹한 전장에 내쳐진다는 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항상 미(美)를 추구하기만 한다는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개념을 낯선 배경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주제를 부각하고 환기시키는 작법은 흔히 사용되기도 했으므로, 의도만 잘 살린다면 무엇보다 흥미로운 변주를 해낼 수 있기도 하다.



전투미소녀의 발원이나 소비 방식에 대한 분석을 다양한 측면에서 해볼 수 있다. 그러나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전투미소녀를 변주하는 방식은 괄목할 만하다. 꽤 간단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놀라게 되는 사실인데, 전투미소녀를 현실에 가까운 전장에 밀어넣는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여기서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나 <세일러문>처럼 전투 후의 정신적인 외상에 시달리는 작품을 데려올 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실의 전장이 아닌 판타지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게 왜 판타지라는 배경을 빌려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 명확해서라는 결론이 나온다. 말하자면 현실의 전장에는 휴우증을 겪는 미소녀가 있을 수 없기에 현실의 외피를 버리고 판타지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별의 목소리>나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도 전장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전제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 세계와는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이때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배경으로 하는 근현대 유럽의 풍경은, 현실 역사와 다르다는 점에서 백퍼센트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풍경의 유사성에서 현실과의 일치가 도드라진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 여성이 군대에 징집된, 인류 역사에서 여성이 본격적으로 징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해당 시기였다는 점에서 이 일치는 더욱 신빙성을 갖는다. 게다가 작품에서 주된 소재로 응용되는 타자수라는 직업 또한 작품 속처럼 현실 역사에서도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었고, 그 여성에 대한 두 가지 요인이 동시기의 배경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속 풍경에 접혀들어가는 순간, 이것은 유효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전투미소녀를 다룬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남성이 보내는 로망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이 보내는 로망이다. 여기서 전자는 남성 팬들의 심리를 충족하는, 소위 말하는 성적 대상화의 위험이 있는 소재를 품기도 한다. 후자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는데, 여성이 여성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는 것일 뿐, 남성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왔기에 그런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데, 이런 물음에 답하는 게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다. 첫 번째로 이 만화의 세계는 만화 속 세계를 벗어났다. 물론 어린 나이에 등장한 괴물 같은 괴력의 소녀라는 콘셉트 자체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애니메이션이 현실에 가까워지려 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 있다는 점에서 이 논의는 유의미하다. 쉽게 말해 박훈정의 <마녀>나 교토 애니메이션의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비슷한 소재이지만, 매체가 다르다는 점을 전제하더라도 다른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근현대 유럽 풍경을 따온 이 작품을 두고서 그 배경 선택에 대한 다른 이유를 찾는 건 쉬운 일이다.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글로벌한 소재를 택했다는 이유도 합당하고, 넷플릭스가 전권을 위임했기에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대로, 일본에서 통하는 유럽이라는 소재를 가져왔다는 이유도 합당하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일본에서 유행하는 유럽풍의 배경이 메이지 유신 시기의 정책으로부터 귀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심의 눈초리가 겨누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배경 설정의 이유가 어떠하든 간에, 실제 역사를 가공의 역사 안으로 편입하여 현실에 가까워지려고 시도하는 것은 기존의 전투미소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지점이고, 그 부분이 이 작품을 흥미롭게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다른 장르에서도 전투에서의 영웅캐릭터와 그에 따른 서사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지만, 전투 이후만을 그리는 작품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게 전투미소녀라는 주인공이라면 더욱 그렇다.



3.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톺아보면 사소하면서도 단순한 변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쟁이 한창인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서 남자 캐릭터는 어떤 형태로든 전쟁과 연루된다. 이때 남자 캐릭터가 전쟁과 연루되는 방식은 다수가 신체에 관한 부분이다. 전쟁 중에 부상을 입고 전역을 했다던가, 또는 징집될 뻔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으레 전쟁 영화에서 그러하듯 전장으로 남편과 연인을 떠나보낸 여자 캐릭터가 다수 나온다. 그러니까 이는 전쟁에 남성이 징집되기에 벌어지는 도식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도식에 대해 무언가 덧붙일 말은 없다. 허나 우리가 진행하는 논의 중에 가장 단순한 것, 역할 바꾸기라는 소재를 그에 개입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범주가 넓어진다.



아무래도 역할 바꾸기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는 이타심의 분야겠지만, 큰 틀에서는 신체와 영혼의 일시적 교환이 있다. 이를테면 <너의 이름은>처럼 유서깊은 육체 바꾸기 장르의 문법이 있을 수 있고, 외국인을 한국 사회에 초대하여 생소하고 낯선 부분을 타자의 시점으로 짚어보는 예능의 문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전장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의 전장일 뿐만 아니라, 아이돌에게는 무대 위일 테고 회사원에게는 회사와 같은 공간에 해당한다. 허나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몸담은 곳이 곧 전장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논쟁적인 분야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쩌면 이는, 어느 정도의 의역을 거친다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전통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구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런 정치성이 발현되는 장소는 기존의 것을 몰아내고 차지한 자리가 아닌, 기존에 없던 것들이 올라온 자리이다.



그릇과 영혼의 부정교합이 자아내는 것은 대체로 희극에 적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기존에 우리가 믿어왔던 장르와 같은 문법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규정이라 함은 법전처럼 유관해석을 지니는 문구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문화의 일종이다. 그래서 이것이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는 정치라는 어감에서부터 이미 신뢰 형성에 실패한다. 정치라는 게 이상을 추구하는 만큼 그 과정에 자리한 진통이 있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정치라는 단어에서 보는 건 이상보다는 진통이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이미지는 올바른 진통이라는 이질적인 문구가 되고, 선두에 서야 했던 이상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진통의 잔상 형태로 남아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진통의 잔상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의 참사를 보여주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도입부처럼 전쟁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덩케르크>의 이야기처럼 전쟁에서 후퇴한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떠나간 이들이 있으면 남겨진 이들도 있다. 이때 떠나간 이들을 추모할 것인지 남겨진 이들을 챙길 것인지의 우선순위를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진통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방패일 것이고, 진통의 잔상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다면 피난민이나 퇴역군인일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과 신체의 관계에서, 신체에 가해진 진통이 있다면 영혼에도 가해지는 진통이 있을 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곳에 무엇이 남아있는지를 관찰하는 것뿐이다. 즉 그 빈 공간을 수복하는 과정은 양자가 기존의 자리, 기득권을 채우려는 난투의 장이 아닌, 부족한 곳을 메꾸어 평탄한 땅을 만드는 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부족한 곳을 채우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전쟁을 겪고 나서 얻게 된 PTSD는 전쟁으로 얻게 된 병이 아니라 전쟁으로 잃게 된 일상이다. 따라서 퇴역군인의 이야기는 전장의 경험이 아닌, 일상으로의 복귀를 주로 다루게 된다. 이때 그들이 꾸는 악몽은 일상이 부재한 자리에 채워진 잔상이다. 진통의 발원지는 사라졌지만 진통의 잔상이 남아 여전한 환상의 형태로 남아있다. 그것은 환상통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주인공 소녀가 두 손이 잘린 채로 극을 시작하는 것은 진득한 전장의 환영이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극의 진행은 전편이 모여 하나의 형식을 구성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옴니버스 형상을 빌려 일상의 조각을 찾아가는 형식이기에 정해진 결론은 있지만 그 중간 부분을 끝없이 늘릴 수 있다. 그래서 이는 어떤 면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으려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누야샤>의 중심 소재가 사혼의 구슬이라는 점과, 그것을 얻으려 하는 이유는 더 강대한 요괴가 되기 위함이라는 작중 설명을 떠올려 보면, 사혼의 구슬이란 반인반요인 이누야사의 반쪽을 채워줄 도구일 테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흩어진 사혼의 구슬을 찾아가는 모험은 이누야사가 신체로서는 요괴의 힘을 채우면서도 영혼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채워가는 과정이다. 예컨대 반인반요라는 설정은 역할 교환의 무대가 그곳이라는 점을 미리 규정해두기 위함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은 이미 결핍이 진행된 신체를 요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결핍이 자리하지 않은 이에게 형질의 변화란, 자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두 개의 결핍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것 같다. 그녀는 신체가 절단된 상이군인이기도 하지만, 영혼이 결핍된 살인기계이기도 하니 말이다.



4.



부재한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전적으로 채우는 이의 의지에 따른다. 그것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의견과도 같다. 과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별개의 에피소드를 거치며 부재의 신호를 지워나가는 소녀의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그것들이 경험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상에 다가서는 방법은 탑을 쌓는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다. 이렇게 나누어진 축조와 봉인의 가치에서 우리가 더 선호하는 건 아무래도 전자, 올라선다는 뉘앙스이겠지만 결핍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말할 때는 후자가 더 나은 선택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체와 영혼 중에 신체는 어찌 되어도 좋은 반면 영혼은 늘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혼에 상처를 입은 이를 치료하는 방법은 상처를 은폐하는 것뿐이다. 은폐라는 표현이 음습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가역적인 판단이자 손상이다.



이 대목에서 드는 생각 하나는, 비가역적인 것의 대표로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점이다. 마음의 상처와 시간이라는 개념의 공통점은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 보인다. 허나 들추어보면 그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그 구덩이를 모르고 밟아서 빠지지 않으려면 그곳에 구덩이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상처를 인정하는 작업이다. 작품의 논의는 이 부분부터 시작되는데, 그 과정보다는 설정 자체가 흥미로운 면이 있다. 첫 번째로, 소녀가 전장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은 전투병기로서의 가치를 채득했기 때문인데,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전투병기로서의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절차에서 각각의 선정에 대한 이유는, 영혼이 없고 육체가 뛰어난 전투병기라는 개념, 영혼이 상처받았고 육체가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근거로 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부재를 채우는 장소는 전장이고, 이점이 다른 작품과 구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보통은 전장에서 귀환한 후에야 부재를 채우게 되니 말이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성장하면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게 된다. 아마도 이게, 어른이 된다는 말이 알려주는 어른의 조건 중 하나일 테다. 그런데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곳이 전장이라면 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은 전장에 나가 인간 고유의 가치를 잃은 채로 돌아오곤 한다. 평소에 잘 아는 사람과의 관계가 죽음과 같은 형태로 단절될 수도 있고, 여러 형태의 단절을 경험하고 나면 어느새 자신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서 만든 말년의 작품이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젊어서 떠돌이 무법자 역할을 하던 그가 노년에도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때, 그것은 변하지 않은 불변의 고집이 아니라 결핍을 지닌 어느 노인의 이야기가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잡이 클린트인 것은 변하지 않지만, 그때와 지금의 그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살인기계라 불리던 그녀가 전장을 나왔다고 해서 그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바로잡자면 그 평가가 굳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따로 없기도 하다. 신체의 상실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그것이 인간의 외피를 달라지게까지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전장에서 부재를 가린 소녀가 그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마주한 풍경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말하자면 전장에서 자랐기에 전장 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세상을 마주한 게 아니다. 전장 안에 있었기에 그곳이 세상이었고 세계였던 이가, 세계를 상실하고 나서도 홀로 설 수 있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전투미소녀가 어느 세카이계의 소녀들과는 달리 세카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전투미소녀 작품에서는 어떠한 계기로 소녀가 전장에 귀의하고 그곳에서 마주한 신천지를 중심으로 작품이 전개되기 마련이지만,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운동 에너지는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한다. 상승이 있다면 하강이 있기 마련이고, 전진이 있다면 후퇴가 있을 것이며, 수축이 있다면 방출이 있을 테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한 발 뒤로 물러서 양보하거나, 받은 것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등의 호혜적 가치, 인간 사회에서 사회생활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운동 에너지이다.



여기서 그러한 잠재되는 쪽의 풍경을 직시하고 나면,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떠오르는 것의 이미지를 포착해볼 수도 있다. 상사의 마지막 명령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는 소녀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그 과정에서 결핍된 것을 채워가면서, 종국에는 마지막 명령의 진의가 공과를 대표하는 상하의 운동이 아닌, 사심에 가까운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태였음을 깨닫는 게 그렇다. 뒤늦게 깨달은 진상이라는 맥락을 지닌 이 풍경은, 망각되었고 억압되었던 기억을 전장의 바깥에서야 비로소 수복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전장의 시간과 마을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시간은 비가역적인 흐름을 지니기에, 소녀의 잘려나간 팔이나 죽어버린 상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뒤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문제일 텐데, 작품이 제안하는 것은 그러한 비가역성(시간)에 저항하는 게 바로 기억, 무언가를 떠올리는 (Recall) 행위라는 점이다.



다소 외적인 이야기를 첨언하자면, 남자들이 전장으로 나갔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빈 공장을 채운 여성들이 사회로 복귀해 무슨 일을 했는지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리벳공 로지라고 불리던 여성 근로자가 종전 후에 돌아온 남성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다시 집으로 복귀했을 때, 그녀들의 정체성은 꽤 애매해졌다. 그래서 집안에서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대전 시기에 그녀들이 했던 업무인 타자수 일이 제격이었다. 이 사실만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섬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집에서 직장으로의 이동이 일상에서 (회사라는 이름의) 전장으로의 이동에 비견될 수 있다면, 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복귀한 그녀들의 모습을 두고서 퇴역군인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퇴역군인이 사회에 돌아왔을 때 겪는 여러 어려움을 떠올려 보면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퇴역군인의 이야기이자, 여성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굳이 구분을 짓자면 전자에 후자가 따라가는 형태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전투미소녀를 다루는 작품의 사례가 후자에 전자가 따라가는 형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구성은 유의미한 시도라 생각된다.



5.



신체의 훼손 측면으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군인에게 전장이 일종의 회사 같은 개념이라 가정할 때, 상처를 입고 전장에서 물러나는 건 군인에게는 해고와도 같은 조치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줄거리를 분석해보면 그런 도식은 페미니즘적인 분화를 겪는다. 먼저, 주인공 소녀가 전장에서 물러나게 된 건 그녀를 전장으로 인도한 상사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무언의 알력이 운동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상사의 유언은 사실상 사회로 돌아가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라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로 본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 잘 살라는 재혼, 또는 재매개의 명령이다. 이때 재매개라 함은, 이전의 사회를 버리고 새로운 사회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흔히 재사회라고 부르는 이것을 재매개라 불러야 하는 이유는 그 단어가 ‘다시 맺어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것은 도식적으로 볼 때 집이라는 전장으로부터 나와 직장이라는 사회로 나가는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는 페미니즘을 위해 준비된 무대가 아니라, 상이군인이 겪는 이야기에 부가적으로 따라붙는 추가요소 같은 것이기에 그 해석의 범주가 크다는 점에서 장점이다. 페미니즘이 어떠한 판단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을 단독으로 내세웠을 때 작품에 균형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고, 그래서 자칫하면 전체적인 붕괴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어서다. 하지만 시대에 조류에 편승하면서도 이전의 것은 바르게 계승하는 면모는 도쿄 애니메이션이라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주로 부각되는 게 감독이라는 아티스트 하나가 회사 전체를 끌고 가는 1인 체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디즈니와 픽사의 스튜디오처럼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어 작품 하나에 공헌하는 구성원 위주의 시스템은 꽤 독특하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스튜디오 구성원의 다수, 임원진의 다수가 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여성이라는 점도 다른 회사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도쿄 애니메이션의 작품들이 최대한 선정적인 면을 피해 가고, 반대급부로는 섬세한 지점들을 짚어나가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전체적으로 좋은 시너지가 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물론 도쿄 애니메이션에 벌어진 화재 참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1인 체제가 아닌 스튜디오이기에 구성원 하나하나가 귀중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화재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화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만든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라는 작품에서 어떠한 희망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일상인 것 같았던 비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처럼 보이던 일상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다. 이러한 순서에서 비가역적인 손상을 겪었다고 알려진 기억은, 감정의 충족과 함께 순차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옴니버스 형식인 이 작품에 에피소드의 순번이 시계열로 정리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홍상수가 <자유의 언덕>에서 보여주었듯이, 바닥에 흩어진 편지를 주워드는 이미지 자체는, 기억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기 보단 그것이 도달하는 결론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어쩌면 매체가 선택하는 편집이라는 것에 대한 기억과 감정적인 측면으로의 변환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중의 말처럼 편지가 전하려는 마음을 담는 것이라면, 편지의 작법은 감정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의 문제를 논하는 매체 문법과 닮아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을 테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애니메이션 한 묶음에서 그 중간에 자리하는 것을 어떻게 배치할지를. 시행착오를 겪다가 종국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는 소녀의 모습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있어 방황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특정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어내려고 노력하지만, 그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는 알 수가 없다. 말하자면 목표를 이루는 것에 있어 완벽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재하는 것들에게는 늘 구원의 목소리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회복과 귀의의 단서가 진부한 사랑놀음에 불과하냐고 비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는 진부함이 곧 사랑의 증표가 된다. 뻔한 이야기지만 사랑하는 이가 해주기에 기분이 좋고, 뻔한 장소이지만 사랑하는 이가 있기에 기분이 좋아진다. 결국 결핍에서 벗어나게 하는 상승의 에너지는 진부한 사랑의 울음이다.

Comments (4)
  • 안녕하세요. 남겨주신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전에 쓴 글은 독립 만화 응원차에 쓴 것이었고, 그렇기에 게시판에 계속 남겨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해당 게시물을 남겨두면서 응모작품을 새로 올린다면, 모두가 사용하는 게시판을 제가 독점하는 듯 보일 것 같아서 해당 게시물은 삭제했습니다.
  • 확인했습니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음지에 주목할만한 소재로 눈여겨보는 만화들이 많은데 그걸 양지로 끌어올려보고 싶습니다. 다만 수위라던가 사회적 통념과 같은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게 좀 아쉬워요. 언젠가 관련 직종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런쪽으로도 꼭 시도해보고 싶어요.
  • 그러한 이야기 역시 넓은 의미의 서브컬처 비평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리뷰대회에는 1차 저작물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쉽게 되었습니다만, 리뷰대회와는 별개로 그러한 작업을 써나가시는 것도 좋구요.
    저도 제 개인블로그를 통해 인터넷 병맛문화나 B급 컬처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꺼내고 있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로그인
소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