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리뷰부문]로판의 스톡홀름 증후군 서사에 나타난 여성 멸시 풍조: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와 나는 이 집 아이를 중심으로

비츄,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와 
시야, 나는 이 집 아이를 통해 보는 여성 억압의 서사.

웹소설이 애초에 즐겁자고 읽는 글이라지만, 한창 읽다가도 멈칫하며 갸웃거리게 되는 작품은 있게 마련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비츄 作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와 시야 作 '나는 이 집 아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주인공 여성을 휘두르며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외치지만 실은 착하고 온순한 애완동물로 만들려는 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낭만과 배려와 총애로 갖은 포장을 하였으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입맛대로 파훼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신을 둘러싼 권력자들이 만든 안전 구역에 갇히고 만다.
이는 로맨스에서 여성의 행복을 얼마나 평면적으로 정의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여성은 이 세계에서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어떤 부분을 대가로 다른 부분을 입증해 나간다.


친밀한 폭력: 가스라이팅은 어떻게 사랑이 되는가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에서 중심 인물 김상희와 '나는 이 집 아이'에서 중심 인물 에스텔은 이세계(異世界) 출신 여성이다. 자신이 속하게 된 세상을 가장 낯선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둘 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전생을 이용하기로 하나, 그 사용 양태는 사뭇 다르다.
(이하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는 '왕딸'로,  '나는 이 집 아이'는 '이집아이'로 줄여 부른다.)
김상희는 이전 세계에서 무심결에 행하던 여우 짓, 꽃뱀 짓을 새 세계에서는 계획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에스텔은 자라면서 자신이 이전 생에서 대한민국의 김서영이었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기억해 내고, 그 때 쌓은 지식을 에스텔로서 살아남는 데에 이용한다.
세상은 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딸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잔혹한 세상에서 김상희는 그 세계 최고 권력자인 오라비들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을 생존 방법으로 선택했다. 실제로 그들 남자 왕족들은 수틀리고 기분이 나쁘면 여자들쯤 아무리 공주라 하더라도 쉽게 죽일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과 닮은 세상에서 에스텔은 창녀의 딸로서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생모에게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당한다. 어머니가 손님을 받는 동안 작은 상자 안에 갇혀서 대한민국의 타블렛 PC를 생각하고, 학교 교육 시스템을 생각하며 자신을 현실에서 유리(遊離)하는 데에 골몰한다. 그대로 현실에 발붙이고 있다가는 자신이 망가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상희가 아비와 오라비에게 끊임없이 학대당하면서도 세상에 귀한 사람이 오로지 그들뿐이라는 양 방긋방긋 웃어댄 결과 남자들은 상희만을 자신의 딸로, 동생으로 인정하였다. 돈 이만 골드에 짐승을 거래하듯 팔려온 에스텔은 카스티엘로 공작이 제 지위를 확언하지 않는 동안 앞으로 자신의 처지를 장담할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사리며 행동을 조심하면서도 사랑을 갈구하는 태도 때문에 공작과 그 후계자는 물론 사용인들마저 어린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왕딸에 나온 남자들은 여전히 상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그 이유에 생사여탈권뿐 아니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보탠다. 결정적으로 다른 여자들과 상희를 자신이 어떻게 다르게 취급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총애를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를 가장 가까이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김상희가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사회 변혁을 꿈꾸고 자신들을 경계한다는 것을, 남자들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심지어 작품이 끝날 때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그 목숨쯤 쉽게 끊을 수 있을 약한 생명체가 살갑게 예쁜 짓을 하면 그리로 정이 가는 것이야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내키는 대로 자신을 핍박할 수 있는 사람이 웬일로 유순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여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과연 건강한 감정일까? 심리학에서는 이와 같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가 신변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통제하는 쪽을 억압받는 자가 옹호하는 현상을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김상희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이집아이에서 카스티엘로 공작가는 에스텔을 귀한 아가씨라고 이야기하면서 끔찍이 싸고돈다. 조금이라도 번잡하거나 위험한 일은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조금이라도 망측하거나 참람한 일이라면 그 이야기의 중요도와는 상관없이 어여쁜 아가씨에게는 숨기기 급급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금은보화에 둘러싸여 순진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는 소망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하려고 한다. 정확히는, 카스티엘로 전체가 나서서 에스텔이 어여쁜 인형 이상의 역할을 원할 때마다 제동을 건다. 
1938년에 패트릭 해밀턴이 발표한 연극 가스등에는 가스등 밝기를 조절하며 아내를 조롱하는 남편이 나온다. 아내가 등 밝기가 줄었다고 이야기하면 그럴 리 없다, 네가 착각했다고 말하기를 반복해 아내의 판단력을 흐린다는 이야기다. 어여쁜 아가씨의 편안한 일상을 지키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에스텔이 원하고 요청하는데도 사실을 숨기는 저들의 행태는 결국 가스등을 이용해 아내의 판단력을 빼앗은 남편이 한 짓과 다를 것이 없다.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힘이 강해서 그렇지, 결국 안락한 감옥에 안주해 버렸더라면 에스텔도 주관을 잃고 멍청하고 사치스런 공녀님 역할에 갇혔을 것이다. 직계 둘이 에스텔을 숨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다루는 양상은 다르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내 KIBUN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너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로 만들어 주겠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퍼붓는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를 다시 저 버러지만도 못한 년들과 같은 취급을 할 것이니 단단히 각오해라."


인형이 말을 하니 뭇 사내들이 놀랐더라


김상희나 에스텔이나, 그저 살아남는 것만을 인생 목표로 삼는 인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스스로 바꾸기를 원한다. 김상희는 자신을 비롯한 뭇 여성들이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여 먼저 권력자를 구워삶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하므로 남자들이 자기를 총애한다 하여 거기에서 발걸음을 멈출 리 없다. 에스텔은 속하게 된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남이 주는 자리에 취해 그 권력을 누리기만 할 성향이 못 된다.
김상희가 학교에 다니면서 두각을 나타낼 때, 에스텔이 창녀의 딸이라는 약점을 잡혀 적진에 들어갈 때 주변에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김상희는 태를 잘 타고난 주제에 꼬리도 잘 쳐서 부왕과 왕자의 총애를 받았으니, 성희롱이나 성폭행 정도는 당해도 싼 인물이다. 아니, 그 세계 사람들에게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새로 산 생체형 오나홀 정도로 취급했으니까. 에스텔은 귀한 카스티엘로 가의 피를 타고난 아가씨인 까닭에 가장 안전한 저택에서 최고급품만 소비하며 어여쁘게 웃는 것 이상을 요구받지 않는다. 오랜 정적이 친모를 구실로 에스텔을 협박하더라도 그것이 보는 것만으로 아까운 어린 아가씨에게 근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희가, 에스텔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주장하는 순간, 주변 인물들은 대경실색하여 어떻게든 그 의지를 꺾으려 든다. 때로는 성폭행으로, 때로는 감금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꽃이고 오나홀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손오공이 재주를 넘은들…


소설 주인공에게 이제까지 머물던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자각은 피할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상희에게도 에스텔에게도 그 순간은 찾아온다. 김상희의 경우에는 나이가 차서 바깥 구경을 할 수 있게 된 날이 그때이고, 에스텔의 경우에는 마법사와 그 제자 십삼을 만난 날이 그때이다.
상희가 밖에 나가서 노예로 일하는 여인들을 마주쳤을 때,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여인들에게 상희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자신의 지위와 권한에 대해 숙지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여인이 위급해 일어난 소란은 그를 먼저 발견한 상희가 아니라 나중에 발견한 왕자와 그 수하들이 해결하고 수습한다. 학교에서 놀라운 학습 능력과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도 그를 성별만으로 시기 질투하는 학우들은 상희가 사기를 쳤을 가능성을 의심한다.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다시 부왕의 입김이 닿고 나서이다. 
에스텔은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나서 이전보다 더욱더 공작가의 금지옥엽이 되었다.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늘어만 가는데, 누구도 선뜻 에스텔이 원하는 수준까지 그것들이 왜 위험한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이유를 온전히 납득할 수 없는 금제는 뛰어넘어야 할 도전 과제가 되고, 그렇게 점점 카스티엘로와 에스텔 사이 갈등 요인도 커져 간다.
처음에 마법사의 제자 십삼을 에스텔에게서 치워낼 때에 그들이 왜 위험한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더라면 에스텔은 얌전히 말을 들었을 수도 있다.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스텔은 금제를 거부했고, 이것이 카스티엘로와 에스텔이 본격적으로 대립한 첫 사건이 되었다.
두 경우에서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은 주인공을 무력하여 보호해야만 하는 인물로 멋대로 설정한 뒤 그 설정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을 압박한다. 첫 나들이 이후 상희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애쓰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제 한 목숨 연명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부터는 여성들의 처우를 개선할 힘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마법사의 제자와 접촉하고 나서 급기야 마법사에게 납치까지 당한 후에 에스텔은 얌전히 집에 박혀 있기보다 자신의 힘을 키우기를 선택한다. 극한 상황에서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고 나아가 개인으로서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김상희가 자국의 왕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귀애받기 시작한 것은 개인으로서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투 중인 군인들을 신비한 빛으로 치유했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로 그 취급을 달리한 것이다. 김상희는 고국의 왕과 왕자를, 자신의 남편을 뒷배로 두고서야 평범한 남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이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남성 가부장의 손에 달려 있다. 김상희와 대조되는 인물로 제국의 황녀 프리지아를 들 수 있었겠으나, 그는 하필 튼실한 후손을 낳는 능력을 각성하는 바람에 모든 능력과 지위를 박탈당한 채 밑이 헐도록 강간당하고 아이 낳는 일에 동원되어 빈사 상태를 맞는다. 이곳에서 천부인권은 남자에게만 있다. 여자가 남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방법은 남자의 총애를 받는 것밖에 없으며 따라서 애교는 여성에게 생존 수단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김상희를 작품에서는 대단한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애교와 조련으로 겨우 숨통 트고 사는 상희를 질투하는 여성이  나온다는 것이 그런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이는 소위 여적여 프레임을 짜는 데에 효율적인 도구이다. 능력 있는 동성을 질시해 불합리와 불공평을 외치는 여성의 등장이야말로, 잘나가는 다른 여자 발목 잡으려고 애쓰는 여성을 소환해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덤터기를 씌우기에 안성맞춤이다. 이것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보면 구조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리 독특하고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것만 가지고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왕딸이 기만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애초에 그 세계에서 남자가 여자를 하찮게 취급하지 않았더라면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살아남을 생존 스킬로서 애교를 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교와 아양은 아부와 접대의 일종인바, 당연히 그러한 행동이 익숙한 자와 익숙하지 못한 자가 나온다. 애교에 익숙한 사람이 하나둘씩 나오면 나올수록, 기득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보아라, 같은 조건에서 저들은 너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 않나. 괜히 사회 탓이나 하지 말고 너도 네 할 일이나 잘해라. 의무가 있은 후에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극중의 김상희처럼 온갖 역경을 뚫고 나온 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득권이 득세한 현세를 떠받치는 정당성으로서 기능한다. 김상희와 다른 여자들과의 갈등에서 작가는 여적여 프레임까지만을 묘사한다. 결과적으로 기득권이 김상희를 자기네 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점은 김상희의 원가족과 남편이 드러내는 팔불출 성향에 묻혀 흐려진다. 그리고 김상희는 명실공히 애교 하나로 남자 잘 휘어잡아 편안하게 사는 팔자 편 년으로 박제된다. 아무리 김상희가 날고 기는 능력으로 여성을 위해 일한다 해도 이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는 한 그는 아무것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에스텔이 힘을 키우고 가문의 일을 처리하며 수뇌부로서 성장한 뒤에 받은 건 까마득한 윗사람 대접이 아닌 언제든지 치정 문제에 얽혀들어 귀찮아질 염려가 있는 여자아이 취급이었다. 밤중에 잠옷 입고 맨발로 집안 돌아다니지 말아라, 남자들이 너를 이제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아느냐. 전형적으로 성폭행 피해자를 탓하는 문구를 놀랍게도 주인공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자가 그대로 읊는다. 
이는 명백히 하극상이지만, 백 보 양보해서 에스텔 개인에 대한 걱정으로 포장할 수 있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공식 석상에서 터졌다. 업무에 필요한 사실관계를 카스티엘로의 모두가(공작 부자의 묵인 하에) 꽁꽁 감춤으로써 에스텔 카스티엘로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수하들은 에스텔을 명하면 들어야 하는 상급자이자 고용인으로 보지 않고 어리고 귀중한 아가씨로 보아 멋대로 그의 명을 거스른 것이다. 카스티엘로 부자(父子)는 에스텔을 가문의 직계로서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귀여워할 어린 딸이자 동생으로만 보았다. 문제의 사실관계는 가문을 나가는 기사 한 명이 에스텔에게 비밀로 하라고 부탁한 것 때문에 덮었으므로 에스텔은 가문의 직계는커녕 옛 부하보다 우선순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업무 능력을 보이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더라도, 결정권을 가진 자들이 그에 합당한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에스텔 카스티엘로는 공작 대행을 할 수 있는 고귀한 공녀님에서 어르고 달래야 하는 철부지 아가씨로 전락한다. 이 세계는 에스텔이 성장해 나감을 좀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두 세계는 주인공의 성장과 발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가장 큰 대적자다. 그리고 그 방해는 정서적 학대와 물리적 폭력으로 구체화된다. 세계는 주인공들이 언제까지나 인형으로 있기를 원한다. 상희는 생존 본능 때문에, 에스텔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 때문에 마지못해 그 틀거리 안에 자신을 욱여넣는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갈등과 균열이 생겨난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상희의 세상에서 여성들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다투어야 하고, 에스텔의 세상에서 여성들은 개인의 의지대로 성장할 권리를 다투어야 한다. 여성의 권익을 증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은 같으나 현안이 다르니 그 행태와 진행 과정도 다르게 나타난다.
상술하였듯 상희는 자신의 생존 수단을 애교로 결정하였다. 그 스스로 조련이라 부르는 일련의 애교술 덕분에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여자들이 생존하는 방법까지 애교로 한정하는 우를 범하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애교 떠는 방법을 설파하며 이렇게 유용한 것을 써먹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하기도 한다. 그것이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데에는 유용할지 모르나 처음 세상에 떨어지면서 꿈꾸었던 변혁을 이루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상희가 애쓴 덕분으로 여성들의 삶은 많은 부분 나아졌다. 공공 장소에서 여성을 마주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까지는 왔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여성들은 병장기를 만드는 재료가 되어 스러지고 그것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으로 포장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기도 하다. 여자들은 상희의 조언대로 남자에게 붙임성 있게 다가가 귀염을 떨어야만 그나마 생명체로 인정받는다. 여성의 목숨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짓은 여전히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 카카오 페이지의 덧글들이 지적하듯, 상희가 한 일은 살아남기 위해 갖은 애교를 떤 것이 전부이다. 그렇게 스스로 조련이라고 부르는 힘든 감정노동을 감내하고도, 상희조차 남자들이 자신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마음대로 제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희가 정말로 여성들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면 그의 교습 과목은 애교에서 끝나서는 안 됐다. 당장 목숨은 애교가 구해 줄 테니 그리 살아난 뒤에는 남자들이 도저히 여자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바꿀 만한 방책을 논의해 보자고 했어야 한다. 그 세계는 출생 성비가 불균형하여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이 태어나니, 애교로 눈을 가리는 한편 뒤로는 저항력을 키웠더라면 반쪽짜리 보호지구를 얻는 게 아니라 자치구 하나는 세울 수 있었을 게 아닌가. 
작품의 말미에서 상희의 남편이 자신의 신혼집을 거대한 섬 하나를 통째로 사용해 짓고는 그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것으로 이 작품이 페미니즘을 구현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모양인데, 이것이 인디언 보호 구역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남자가 자신의 신혼집에 그런 규칙을 건 이유는 아내인 상희가 바깥의 불평등한 세상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인즉 내 여자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라는 이야기다. 남편 자신이 평등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소유인 아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자기 집을 아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로 만들었다. 
이것이 페미니즘인가? 아니, 오히려 마초에 가깝다. 마초이즘은 남성 가부장에게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방어 및 보호한다는 책임을 상정한다.(2016,Wikipedia) 일단은 여기에서 시작하자고는 하지만, 당장 그 권역을 벗어나면 이전과 똑같은 멸시를 받는 여성들이 널리고 깔린 곳이 그 세계다. 권역을 넓히는 데에 여성이 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자가 자신의 구역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방식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공간이 늘어난다. 타인이 시혜적으로 내미는 자유와 평등이  진정 자유이고 평등인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니 젠더ㆍ섹스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 페미니즘인데, 그 평등을 남성의 재량권에 부친다면 이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논리인가?
에스텔의 처지라고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여전히 카스티엘로는 에스텔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가주의 권한으로 알려 주어도 좋을 정보를 선별한 뒤에 그것을 공녀님께 바칠 뿐이다. 하여 에스텔은 공작가에 매이지 않은 자신만의 수하들에게 정보를 보고받고 그를 바탕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에스텔의 일거수일투족은 가주와 그 후계자가 꼼꼼이 알아두지만, 에스텔은 카스티엘로 공작이나 소공자가 왜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전말을 알지 못해 좌충우돌한다.
 알지 못하니 알려 달라고 말이라도 하는 날에는, 네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그런 걸 알려 주느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카스티엘로의 오랜 금제를 푸는 과정에서 에스텔의 인간 관계가 개박살이 나든 말든, 어린아이가 위험한 전장에 나서 괜히 눈먼 칼에 맞아 애먼 목숨만 잃을 수 있으니 저택에 꽁꽁 숨겨 두겠다는 태도를 다른 이도 아니고 직계 둘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한다. 
그들이 에스텔 카스티엘로를 진정 카스티엘로의 직계이자 고귀한 권한을 가진 공녀로 대접하려 했다면, 이렇게 업무를 방해하고 행적을 사사건건 막을 것이 아니라 에스텔에게 맞는 보좌를 완벽히 수행했어야 한다. 카스티엘로 공작가에서 에스텔은 학대당한 심신을 추스르는 요양 기간 말고는 단 한 번도 다른 직계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공적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어리고 예쁜 내 아가씨일 뿐이지 그 저택 안에서는 도무지 어른이 될 수 없다. 흑집사 극장판  Book of the Atlantic에서, 엘리자베스 미드포드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떠올린 이야기가 있다. "여자아이는 향신료, 설탕, 그 밖의 아름답다 이야기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 정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름답게 남아라." 여자아이는 모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 하였다.  엘리자베스 미드포드와 에스텔 카스티엘로가 묶여 있는 금제는 이토록 아름답고 안전한 공간이다. 
카스티엘로를 비롯한 모두가 에스텔을 장미 정원의 순진하고 어린 아기씨로 만들려 하였고, 미드포드를 제외한 모두가 엘리자베스를 장미 정원의 연약하고 어린 아기씨로 만들려 안달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그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에스텔은 푸른 사슴의 방을 뛰쳐나와 벌새가 숨긴 왕관을 제 힘으로 부수었다. 허나 그 행동으로 제국 내 위상은 높아졌을지언정 에스텔 개인을 싸고도는 자들을 물리치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제 목숨까지 거는 위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위해 싸웠더니 돌아오는 것은 다칠 거 뻔히 알면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왜 하느냐는 타박이다.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상희도 에스텔도, 분명 귀애받는 고귀한 아가씨다. 한데,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귀애받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상희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작품 끝날 때까지 '애칭'이 똥개다. 형제들이 어릴 때 상희에게 멸칭으로 내뱉던 말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음가를 그대로 두고 고스란히 애칭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너는 나에게 똥개만도 못한 존재야'와 '너는 내 소유의 똥개니까 나 말고 아무도 못 괴롭혀' 중 어떤 것이 덜 비참한가. 사랑하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멀쩡한 이름을 부르면 아이가 무병장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신도 없는 사회에서 왜 사랑하는 아이를 이다지도 낮추어 부르는가. 상희의 원가족이 퍼붓는 사랑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애지중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인들이 아무리 상희를 자신들의 첫딸이나 소중한 여동생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은 호칭을 아무렇게나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하다. 
상희가 전생에서 괴한에게 죽고 나서, 그 세계의 연인은 '저녁에 된장찌개 끓여 놓을 테니 일찍 와라'라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며칠에 걸쳐 가장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자살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희가 원하는 애정이었던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둘의 온도는 항상 달랐다. 상희는 그 연인에게 한 번도 자기가 원하는 정도의 애정을 적당하게 받아 본 적이 없다.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지만, 애정표현의 정도에 관한 이야기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은 것이다. 합의를 보지 못해 넘치고 마르는 애정이 결국 두 사람의 현생을 이어 주었다지만, 그건 조금만 잘못해도 방향을 잃고 흩어질 위험이 너무 높은 불균형이었다.
에스텔 카스티엘로에게는 든든한 아버지와 오빠가 있지만, 이들의 사랑법이야말로 에스텔의 숨통을 조인 주 원인이다. 이 부자는 에스텔을 위에 이야기한 '향기롭고 순진한 장미 정원 아가씨'로 숨기고 가두어 기르기를 원한다. 특히 차기 공작은 에스텔이 안전한 보물 방을 나와 세상으로 걸어가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위험하니 싸고돌려 든다. 무엇이건 자기가 판단하기에 에스텔에게 위험하거나 필요 없는 것이면 제 선에서 그를 차단한다. 이것이 보호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에스텔이 그러한 보호를 원했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러한 보호가 효과가 있었는가? 그럴 리가 없지. 에스텔은 생일날 제 집에서 납치를 당한 인물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이들 세계는 상대방에게 필요한 애정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을 퍼붓는다. 숱한 역경을 헤쳐 나오는 동안 그들이 동생을, 딸을 싸고도는 장면이 아무리 많이 나와도 여전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던 건 이 때문이다. 


화려한 케이지 속 낙원의 풍경: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하고.


작품의 결말부에서 상희와 에스텔은 결국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그 세계의 실권은 남자들에게 있고, 둘 다 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상희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공식 업무는 목욕을 하여 성수를 만드는 일과 입김을 불어 전사들의 원기를 돋우는 일이다. 제 남편의 공간에서조차 여성을 대상화하는 이 사고방식을 뜯어고치지 못한 것이다. 남편이 만들어 놓은 무릉도원에서 상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일상을 즐기는 것뿐이다. 밖의 상황을 신경쓴다 해도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가족에게만 집중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 상희에게 가장 마음 편한 삶일 것이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에스텔은 여전히 자기 가문의 존폐가 걸린 문제에 참여할 기회를 직계 둘 때문에 잃을 뻔하지만, 기어이 가문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죽음으로 뛰어든다. 허나 그렇게 모두를 구해도 카스티엘로는 여전히 어리고 여린 공녀를 잃지 못해 안온한 시간으로 에스텔의 눈과 귀를 가리려 한다. 에스텔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다. 
뭐, 이전보다 취급이 좀 낫기는 하다. 여전히 행동 반경이 집안과 영지를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정도로 사랑은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말없이 사라져도 되는 건 주변 인물들 한정이고, 에스텔은 잠시만 자취를 감추어도 온 식구들이 난리를 피우며 수색에 나선다. 메시지는 명백하다. 내가 너를 볼 수 있는 공간 안에서만 너는 자유로울 수 있다. 내게서 떨어지지 말라. 처음에는 불평등하기만 했던 관계에 애정이 얽혀들면서 까딱 잘못했다가 훌륭한 가스라이팅이 될 환경을 갖추고 말았다. 앞으로도 영영, 에스텔은 그 권역 안에서만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축복인가 저주인가.


사랑, 사랑? 사랑!


물론 주인공들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해서 정서적으로 학대당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로맨스 장르에서 클리셰에 가깝게 쓰고 있는 보호와 사랑은, 소위 '씨발데레'라고 부르는 김 첨지 식 애정표현은 과연 양쪽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개념인가?  로맨스의 클리셰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세계에 안전하게 복속 및 편입된 것을 확인시켜 주고 그것을 해피 엔딩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창작자가 클리셰에서 불평등 요소를 확인하고 제거하는 것을 게을리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연인과 완전한 의미로 평등해질 수 없는 세계를 이다지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진정 창작자의 의도였다면, 사상을 업데이트하는 데에 완고하고 게으르다는 평을 듣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세상에는 사랑으로 감출 수 없는 부조리가 너무 크고 너무 많아서, 보기 싫다고 가리려 해도 제대로 다 가릴 수는 없다. 그것을 픽션에서마저 보고 싶지는 않다.


두 작품의 존재 의의


그리하여 나는 비츄의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와 시야의 '나는 이 집 아이'는 비판적으로 보아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는 로맨스로 돈을 벌고 싶은 남자 작가와 그가 타게팅한 주요 독자층이 여성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놀랍도록 자세하게 드러낸다. 
딸바보, 팔불출, 영아 강간, 매매혼, 명예살인 등이 드러내는 정서는 일관적이다. 여성 멸시 및 혐오 풍조. 이 작품은 페미니즘을 구현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를 일깨우는 이야기다. 서술자가 지속적으로 '대한민국과는 달리 이곳은 남존여비 사회라서……' 운운하는 것까지도 창작자가 평소 타게팅하는 집단의 사고방식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어찌해서 남자들은 여자가 천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저는 여자 좋아하는데요?'가 여성혐오에 관한 한 면죄부가 되어 줄 수 없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지금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나는 이 집 아이'는 어째서 소심한 남자들이 자존감 떨어지는 여자를 집요하게 연애 상대로 선택하게 되는지를 아주 잘 보여 준 작품이다. 에스텔 카스티엘로는 창녀 밑에서 자라는 분홍눈이었을 적에 정서적 · 감정적 학대를 당했다. 그 어린 마음에 가장 아프게 박혔을 한 마디는 '너 같은 건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이다. 당연히 분홍눈은 자신을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공작가에서 생활하게 되었음에도 '나 같은 게 여기서 아가씨 대접을 받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걱정한다. 
예쁨받고 사랑받기 위해 예의범절을 배우고, 살아남기 위해 정치를 배우면서 그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은 '나는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확신이고,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인정이다. 사랑받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이 보듬어 지켜야 할 것 같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구에게나 웃으며 살갑게 대해 주는 소녀를 제 품에 가두면 제게만 상냥하게 대해 줄 것 같다. 힐난과 칭찬으로 장난질을 해 놓으면 꼼짝없이 나만을 따르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밀고 당기고 맺고 끊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 될 테니 나의 어린 아가씨가 품는 연심쯤이야 내가 조작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기는 싫으니 언제까지나 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로 있어 주면 좋겠다.
이 얼마나 쉬운 상대인가. 사랑받고 싶으나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는 상대를 조련하는 방법으로 이만한 것이 또 없어 보일 터이다. 그러니 연인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반면교사 삼아 자존감부터 키울 일이다. 스스로 설 수 있어야 연인 간 권력 구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나는 이 집 아이'는 여성을 언제까지고 유아 취급하려는 자들이 어떠한 언행을 보이는지 낱낱이 묘사하였다. 사랑과 보호로 울타리를 치고 조금이라도 그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이게 다 너를 위해 하는 소리야' 라는 말로 세뇌를 시작한다. 에스텔은 그나마 인생 2회차라 거기까지 버틴 것이지, 정말로 그가 분홍눈으로서 처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면 끊임없이 바깥 세상을 동경하면서도 단 한 발짝도 스스로 떼지 못하는 카스티엘로의 애완동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성의 날개를 꺾으려는 상냥한 적들에게 맞서 끝까지 버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나는 이 집 아이'를 집어들어도 좋다.


사족: 이거 나만 불편해?


생각외로 글을 길게 썼다. 이 글을 착실히 따라온 독자 중에는 그래서 이렇게 길고 건조한 글을 도대체 왜 쓰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 줄로 안다.
꽤 오랜 기간 덕질을 하면서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쳐내고 나니, 문학 쪽에서는 로맨스 소설 쪽이 가장 많이 남았다. 하여 여러 연재 사이트에서 흥미 있는 글들을 찾아내 읽는 것이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
한데, 고르고 쳐낸 로맨스 소설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거슬리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저것이 과연 해피엔딩인가, 저놈은 주인공의 연인 자격이 있는가(정확히는 서로 불타오르는 기간이 지나도 제멋대로 연인을 휘두르지 않을 사람이 맞는가), 저것이 과연 사랑인가 등등이다.
처음에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전생을 똑바로 기억하는(것처럼 보이는) 김상희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 혁명을 일으키는 스토리를 기대했다.
어느 순간까지는 실제로 김상희가 많은 것을 바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불편한 요소를 애써 무시하며 완결만을 보고 달렸다. 그러나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피로 이룩한 무릉도원이 아니라 아름다운 울타리를 두른 짐승 우리였다. 작품 초반에 주인공이 뛰어넘기를 기대하며 유심히 보았던 숱한 장애물 중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결말에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했던 건 단 하나도 유의미하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서술자, 나아가 작가는 김상희가 이 커다란 세계관을 파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끔찍할 정도로 현실과 닮은 숱한 설정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작가의 다른 작품 목록을 보고야 그 답을 알았다. 이 작가는 처음부터 여성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좁게는 대한민국의 20대에서 30대 남성 독자를, 넓게는 여자를 보급품으로 보는 남자를 타게팅한 작품이다.  생각을 전환하고 나니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숱한 불편함은 당연함이 되었다.
항간에는 '남자가 어디 여자들 노는 로판에 들어와서 분탕질을 치려고 드느냐, 제놈들이 판타지 쪽에서 여자가 주인공이기만 하면 로판으로 꺼지라고 그다지도 성화더니 로판이 돈이 되니까 저놈들 슬금슬금 로판 넘보는 것 봐라.' 이런 평이 있다. 기왕 왕딸을 페미니즘과 붙여 놓으려는 시도가 있는 판이니 이 연결고리를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어졌다.  여자들의 환상을 집약해 놓은 곳이 왕딸의 세계관이라는 소리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이 집 아이도 마찬가지다. 나도 처음에는 이 작품을 (기다리면 무료 서비스 작품임에도) 매 화 소장권을 구입해 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전작인 시그리드와 시카 울프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믿고 지르는 작가 시야이니 괜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위에서 숱하게 언급한 마법사와 조우 에피소드를 전환점으로 쓰기 전까지는 에스텔을 감싸고 있는 따스한 세계 전체가 그저 좋아서 마냥 흐뭇했다.
그러나, 작가가 에스텔의 짝으로 점지한 에멜 아스트라다가 플러팅을 시작하는 부분부터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자는 예전부터도 살가움과 나댐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더니, 이제는 제가 모시는 아가씨가 그렇게까지 쉬워 보이는 것인가? 아, 이 기사는 앞으로 사사건건 에스텔에게 반기를 들겠구나.
한데, 황당하게도 무례한 성추행 발언이 플러팅이었고 이놈이 감히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설정이 튀어나왔다.  하나가 아니꼬우니 다른 것도 곱게 보이질 않았다. 저놈이 하극상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자는 누구인가. 누구긴 누구야 저택의 주인인 카스티엘로 이안이지. 그러고 보니 그 아들이라는 놈도 틱틱거리긴 되게 틱틱거리면서 에스텔을 방에만 가둬 놓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아, 수뇌부가 귀한 아가씨를 그따위로 취급하니 저놈이 기어오르고도 목숨이 붙어 있는 거구나?
덧글에는 아인 같은 아버지에 카를 같은 오라비라면 그 셋이서만 살아도 좋겠다고, 차라리 그 둘이 남주인공 같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기야 자상한 부자이긴 할 것이다. 너는 아무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그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렴 소리를 현실에서 누가 그리 자주 들어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정작 에스텔이 자기 하고 싶은 걸 보여 주면 카스티엘로로서 해야 하는 일 기준이 아니라 어린 여자아이에게 적당한 일 기준으로 거르는 꼴을 보면서 그 두 사람에게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상대방이 걱정할 테니까 내가 하는 더러운 일을 숨긴다는 발상은 또 얼마나 구역질이 나던지. 제국과 카스티엘로에 중요한 일 중 처음부터 에스텔의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 보면서 그 취급을 감내하는 에스텔에게 동정마저 느꼈다.
작품의 결말은 통상적인 로맨스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분명 행복하다. 죽고 못 사는 연인과 결혼해 한 집에 살게 되었고, 아끼는 심복은 오라비의 가족이 되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가장 질긴 인연으로 엮였으니 겉으로 보기에 행복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가족이 에스텔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 에스텔이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와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작 에스텔의 성장을 기쁘게 지켜보고 응원한 것은 고용인들이고, 가족에게 에스텔은 영원히 귀여운 나의 아가씨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집에 속해 있는 이상, 에스텔은 영원히 그 집의 가장 어린 '아이'에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성장을 계속하는 여인에게 피터팬이기를 강요하는 이 풍조에는 무엇인가가 있겠구나. 그렇다면 이 또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의 하나일 테니, 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와 나는 이 집 아이를 페미니즘으로 묶는다면 둘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겠다.'
글솜씨가 일천하여 이 긴 글을 쓰고도  처음에 생각한 걸 모두 담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 재미있고 흡족하다는 글을 읽으며 나는 왜 이다지 불편한가' 하는 생각을 한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기를 감히 바란다. 애초에 두 글을 칭찬하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누군가 내 감상평을 읽으면서 속이라도 시원해졌다면 그 또한 다행이다. 




참고문헌 목록




소제목(설렁탕): 현진건, 운수 좋은 날(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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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스물 여섯. 불미스런 사건으로 소박하지만 아름답던 연인 진수와의 사랑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에서 공주님으로 환생한 수희. 하지만 이곳은 남존여비가 팽배한 세상! 공주님 에게도 예외는 없다!! 상희 라는 이름으로 다시 환생한 그녀의 눈에 이 세상은 작은 것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찬 포부와 함께 그녀의 앙큼한 반란이 시작된다 .


Comments (2)
  • 응모 확인하였습니다. 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와아... 심도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해 볼 내용이 담겨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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